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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리사 Mar 04. 2021

새로운 즐거움

웰빙 에세이

Enjoy(즐기세요)!

해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았다면 분명 즐거운 추억이다. 그 사람이 판매사원이 아닌 다음에야.


몇년 전에 시카고를 학회 참석 차 갔었다.  어찌하다가 출발 직전 동행이 와해되었다.  외국을 혼자 간 건 처음이고, 길치라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면서 떠났다.  도착해서 시내를 둘러보러 숙소를 나섰다.  친절하게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길을 물었다. 다행히 방향이 같아 한참 걸었다.  미술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콘서트 홀까지 개관시간, 할인 정보등을 주루룩  알려주는 거다. 너무 고맙다, 사실 혼자 와서 걱정했는데 마음이 많이 놓인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도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라 그 기분 안다, 하지만 시카고는 정말 매력적인 도시다,  Enjoy!!하면서 헤어졌다. 도착하자마자 대화를 나눈 그녀의 목소리는 시카고에 머무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Enjoy!! 얼마나 좋은 말인가. 


우리는 뭔가 '즐거움'이라고 하면, 이기적이거나 지나친 쾌락등의 부정적인 인상을 받지는 않는지. 자제해야 할 느낌부터 들기도 한다.  '행복'이 인생의 최고 목표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주위에 행복한 사람들이나 순간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행복은 왜 손에 넣기 어려운가

행복 심리학에서는 행복의 '포화 이론'을 말한다. 행복이 지속되기 어려운 이유는, 일단 도달하면 '이미 아는' 평범함이 되어버려서라고. 조금씩 다른 수위로, 행복을 위한 자극이 계속 주어져야 하는데 일상에서 그게 어려우니까. 긍정 마인드에서는 '고마움' '인정하는 것'을 강조한다. 가진 것을 세보라든가,  밝은 면을 바라보라든가 등등. 문제는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속으로 점점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는 점이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난리다. 오늘 내가 열이 나지 않고, 편히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 아닌가. 올 봄에 열이 나서 자가격리를 수일 간 집에서 한 적이 있다. 결국 목감기로 판명되었지만,  환자를 보다가 그것도 안심외래에서 고열이 날 때의 황당함이란.  코로나 검사를 받으면서도,  그때까지 내가 본 환자들, 직원들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오전 열시 반인가, 진료를 중단하면서 세어보니 내가 만난 사람이 40명이 훌쩍 넘었다...바로 얼마 전에도 밀접 접촉자의 이차 접촉자가 될 뻔한 아찔한 에피소드를 겪었다. 그 날 오전은 머리가 하얘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의심되었던 분이 코로나 음성이 나와서 잘 마무리되었지만.  '와 정말 건강하기만 하면, 어떤 불평도 말아야겠다' 싶었다. 


새로운 즐거움을 통한 행복 누리기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는 새로운 즐거움이다. 

오감을 동원한 즐기기.


사소한 일상에서의, 감각적으로 충분히 누리는 것 말이다.  우리가 새로운 브랜드의 커피를 찾거나, 새로운 유행의 디자인에 열광하거나,  새로운 드라마의 팬이 되거나, 등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즐거움을 감각으로 바라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손쉽게 자주 즐기는 것은 미각, 즉 음식일 듯하다. '네가 아는 그 맛'이라도 오랫만에 먹으면 새롭다. 누가 사주는 것은 뭐든지 맛있다. 기온은 어떤가. 삼한 사온이라고 춥다가 하루 반짝하면 그 날씨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지나가는 누군가의 향수를 알아채는 후각도 좋고,  아이의 통통한 볼을 꼬집는 촉각도 좋다. 감각의 충족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 이것은 소확행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이 기대가 삶을 유지시켜 준다면, 정확히는 삶을 버리지 않게 한다면 믿어지는가. 사실이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내 분야는 아니지만 자살방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무도 같이 가 주지 못하는 길에 서 있는 말기 환자들을 매일 본다. 그들은 놀랍게도 여러 소망들을 생생하고 절절하게 붙들고 있다. 그 분들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반대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 그 분들의 고뇌를 또 절박함을 나는 다 알지 못한다. 그저 한편에서는 그리도 안타깝게 부여잡는 생명의 불씨를 한편에서는 스스로 꺼뜨리는구나 싶어서.  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까 생각해봤다. 어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쓰신 수필을 읽었는데.  삶의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 아니 사라진다고 느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 묘사는 참 인상적이었는데. 한 끼 음식의 맛, 편안한 수면, 내일 만날 누군가, 등 무엇이라도 희망이 된다고. 그건 거창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대부분 사소한 것인데,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은 지난 늦가을 점심에 보슬비가 멈춘 틈을 타서 병원 후면의 공원 산책. 디딤돌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는 건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적당한 습기의 대기 속에서 돌을 밟은 감촉. 다 알던 것 같으면서 새삼스러운 느낌. 작지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받은 기분이었다. 


'즐거움'이 너무 피상적으로 들린다면 '다행'이나 '위로'는 어떨까. 오늘은 날이 흐려서 눈이 부시지 않으니 다행이야. 입원 환자들에게 간밤 큰 사건사고가 없었으니 다행이야. 코로나 블루라도 다니는 직장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스트레스를  받고 들른 커피샵에서, 바리스타가 내 음료 취향을 기억해준다면 그날 작은 위로가 되지 않던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는 금언이 있다. 의학 연구방법론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에는 '모든 나이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다 일리가 있는 말들이다.  아이들 말대로 '노잼'인 일상일 것인가,  주어진 일상을 다양한 각도로 최대한 오감을 동원하여 누리며 살 것인가.  어느 입장을 선택하느냐는 우리의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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