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으로 <기생충>이 호명되자 연단에 올라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며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기생충>의 제작사 대표 곽신애였다. 봉준호 감독은 그녀를 '집안의 큰 엄마이자 이모'라며 공개적으로 인정했고, 작품상을 받자 당연한 듯 가장 먼저 마이크를 넘겼다. 배우가 좋은 감독 만나기를 고대하듯, 감독은 좋은 제작자 만나기를 고대한다. 곽 대표는 봉 감독이 2015년 4월에 건넨 기생충의 시놉시스를 보고 흔쾌히 제작에 뛰어들었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내내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제작자(producer)는 만드는 사람(maker)이다. 영어권에서는 두 단어가 구분되어 있지만, 국어사전은 제작자를 "물건이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뜻을 혼용한다. 흔히 영화는 감독(director)이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감독은 영화의 예술적인 부분을 책임질 뿐이다. 기획, 투자, 예산 집행, 스태프·배우·장소의 계약과 같은 제작 전반의 실무는 바로 제작자가 책임진다. 제작자는 영화라는 프로젝트의 최고 경영자인 셈이다. 비유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 꿈이나 자아실현은 인간다움을 위해서 있어야 하지만, 의식주는 인간으로서 일단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과 같다. 그렇기에 제작자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하다.
제작자는 영화로 만들 작품을 어떻게 고를까? 하나의 영화 프로젝트에는 대규모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며, 투자 대비 수익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선택의 기준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때 제작자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시놉시스(synopsis)이다. 시놉시스는 작가의 의도를 다른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영화의 전체 내용을 요약한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시놉시스를 통해서는 주제 및 기획의도, 등장인물, 전체 줄거리 등 핵심적인 내용을 1~2장으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검토해야 할 스토리가 산더미인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흥미를 끄는 시놉시스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흥미를 끌었다면 반은 성공이다. 그리고 시놉시스에 스토리라인을 포함시켜 주요 사건을 구체화한 트리트먼트(treatment)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게 한다. 독자가 헤드라인에 이끌려 신문 기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본문이 엉망이라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놉시스로 관심을 끌었다면 탄탄한 스토리라인이 담긴 트리트먼트로 제작자의 흥미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
시놉시스는 요약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요약이란 말이나 글의 요점만을 간추린 것을 뜻한다. 한때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방법이 크게 유행했었다. 기존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글자들을 빼곡히 채워 넣는 대신, 상징적인 이미지나 몇 단어(혹은 몇 문장)로 발표 내용을 요약해서 스크린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젠테이션 기법은 스피치계에 파란을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아사다 스구루의 저서 「종이 한 장으로 요약하는 기술 1Page」는 서류 한 장으로 자신의 머릿속이 상대방에게 보이도록 구체화하라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저자는 도요타의 수없이 많은 한 장 짜리 보고서를 관찰하며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이를 도요타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커뮤니케이션의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그 공통점은 3가지 요건과 5가지 구조로 되어있다. 먼저 3가지 요건은 "한 눈으로 전체가 보이는 일람성, 틀(프레임), 틀마다 제목(타이틀)"이다. 이어서 5가지 구조는 한 장의 보고서 속 내용에는 "목적, 현상, 과제, 대책, 스케줄"을 일목요연하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내용을 작성할 때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불필요한 군살은 모두 걷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말의 내용을 흐름에 따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보다, 핵심만 간단히 요약하는 것이 더 어렵다. 요약해서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말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하거나, 간단하게 메모해두어야 한다.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의 과유불급(過猶不及)처럼, 요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여러 장의 보고서보다는 핵심만 요약한 한 장의 힘이 더 강하다.
"제작자 곽신애, 시놉시스 보고 투자… ‘기생충’ 탄생 일등공신", 국민일보, 2020.02.11.
"반도 시놉시스", 스포츠조선, 2020.06.01.
연상호, <반도>, 2020.
아사다 스구루, <종이 한 장으로 요약하는 기술 1Page>, 시사일본어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