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 타자기 앞에 앉아 피를 흘리면 된다네.

by 이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별 게 아니지. 그냥 타자기 앞에 앉아 피를 흘리면 된다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밍웨이는 "피를 흘린다"며 창작의 고통을 묘사했다. 그의 "별 게 아니다"라는 표현은 "별 게 맞다"는 이중적 의미이고, 글 쓰는 행위를 피를 흘리는 상태에 은유하며 그 고통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냥 "글 쓰는 것은 정말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헤밍웨이의 표현이 더 매력적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치 손가락을 튕기며 별거 아니라는 듯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실제로는 여기저기 피투성이에 절룩거리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헤밍웨이이지 않은가?


영화 <감시자들>(2013)은 범죄 대상에 대한 감시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경찰 감시반을 소재로 하고 있다. 동물적 직감과 본능, 탁월한 기억력과 관찰력을 가진 감시반원들은 그들의 특별한 능력 활용하여 범죄의 단서를 추적한다. 일반인이라면 쉽게 놓칠 수 있는 찰나의 표정과 행동, 작은 단서에서도 인과 관계를 밝혀내는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영화의 메시지 중 하나는, 말이란 쉽게 꾸며낼 수 있지만 무의식적인 행동과 습관은 꾸며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단서가 아닌, 감추어진 무언가에서 더 진실다운 진실을 발견한다.



시나리오에 대하여


시나리오란 영화 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각본을 뜻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장면 표시, 지문, 대사로 이루어진 장면(scene)들을 플롯의 순서에 맞게 배열한 영화의 각본이라고 할 수 있다. 장면 표시는 시간과 장소로 장면(S#)을 구분하는 것이고, 지문은 배경이나 상황 또는 인물의 행동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대사는 인물이 하는 말로써 대화, 독백, 내레이션 등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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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석, <감시자들>(2013)의 시나리오와 영화 속 장면


시나리오는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닌, 시각적으로 재현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 따라서 읽는 사람이 작가가 의도한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작가만 이해할 수 있는 주관적 문장이나, 소설에서 쓰는 과거형 문장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시·청각적 매체인 영화의 특성을 살려 대사보다는 표정이나 몸짓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이나, 은유·상징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전달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셔레이드(charade)라고 하는데, 간접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흥미까지 유발하기 때문에 흔히 사용된다.



시나리오가 주는 소소한 슬기, 비언어적인 요소


시나리오는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비언어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연극 대본인 희곡은 작품의 현실 묘사에 있어 제약이 많다. 때문에 많은 부분을 대사로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작품의 현실 묘사에 있어서 제약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영화는 대사보다 지문을 위주로 쓰이게 된다. 왜 시·청각적인 매체일수록 대사보다는 지문을 사용하는 것일까?


성림출판, 「고등학교 커뮤니케이션」, "메라이번 법칙의 3요소"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교수인 앨버트 메라이번은 그의 저서 「조용한 전언」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를 제시했다. 대화에서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적 요소가 55%, 청각적 요소가 38%, 언어가 7%를 차지한다. 이에 따르면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상대가 하는 말은 7%에 불과해 그 영향이 미미하다. 반면 대화 시 목소리나 외현적 태도 등 말의 내용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요소가 무려 93%에 달해 그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다. 즉, 좋은 이미지는 말의 내용보다는 호감을 줄 수 있는 표정이나 몸짓, 매너, 용모, 목소리 톤, 음색 등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비언어적인 요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습관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말의 내용보다 상대의 생각이나 심리에 대한 신뢰성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시나리오는 왜 셔레이드를 통해 영상적 글쓰기를 하는지, 사람들은 왜 글보다 영상을 더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조의석·김병서, <감시자들>, 2013.

조의석, <감시자들 시나리오>,, 2013.

이정국 외, 「고등학교 시나리오」, 서울특별시교육청, 2018.

김종갑 외, 「고등학교 커뮤니케이션」, (주)성림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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