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다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주어진 삶이 버겁다고 느껴졌던 유년기 때문이었을까. 진시황은 영원한 생을 위해 수은을 먹고 병마용도 지었다는데, 그에 달리 대한민국의 평범한 레즈비언인 나는 도무지 불로장생에 욕심이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없으면, 눈을 감더라도 미련 한 줌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매사 미지근한 태도를 가진 탓에 비관적이면서 염세적인 사람이었던 거 같다. 부정적인 감정 위에서 부유하는 일상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십 대 초중반 내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다녔다.
필자가 대학을 입학할 때만 해도, (물론 그리 오래 전은 아니다) 자기소개서가 중요했다. 그중에서도 지원 동기는 하이라이트라고 특히나 중요했기에 공들여 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데, 영화나 책을 보고 전공을 결정했다는 말을 가벼울 수 있으니 지원 동기로 쓰는 건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필자는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주커버그의 이야기를 담은 '소셜 네트워크'라는 영화를 보고 전공을 정했기 때문이다. 가볍게 시작하는 게 뭐가 어때서.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말씀도 있는데 말이다.
그럼 이 레즈비언은 어쩌다 출산을 결심했을까? 놀랍게도 이번에는 책이었다.
(이건 절대 과장이 아니며, 성인 독서율 38.5%를 기록한 2026년 대한민국에서 독서 증진을 위한 기믹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대체 누가 책 보고 출산을 결정해?' 싶겠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이 탓에 지인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어쩌다가 출산을 결심하게 됐냐고 물어보면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다.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가 나를 엄마로 이끌었어.' 이런 이상한 문장을 구구절절 내뱉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이 생각하는 선한 행동, 예를 들면 부모가 선택의 기로에서 자녀를 살리는 행위 등이 모성애나 추상적인 사랑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단지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일 뿐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친구나 가족을 위해 죽어줄 수 있다고 말할까. 이기적인 유전자에 따르면 내 유전자의 존속이 가장 중요한데'.
거기서 스스로의 생존보다 타인의 생존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다는 걸 깨닫고 충격에 빠졌었다. 그럼 언젠간 가족이나 친구가 사라지면 이 지구에 나를 잡아둘 선은 대체 뭘까라는 질문이 오래오래 머릿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답에 도달했다.
'내 가족을 만들어야겠어.'
비혼모, 동성애자 출산 관련 영상에는 '이기적이다'라는 댓글이 질린다 싶을 정도로 달린다. 이 반응에 대해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맞지만 틀리다'. 먼저 출산은 태초부터 이기적인 행동이다. 우린 아무도 아이한테 태어나고 싶은지 의사를 물어보고, 임신을 진행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른의 결정만으로 출산을 강행한다. 그러니 출산은 본디 이기적인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출산은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한다. 여성에게는 신체를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도박 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길지조차도 알 수 없다. 2020년대이지만 아직도 연간 20명 전후로 산모가 출산 과정에서 사망한다. 이에 묻고 싶다. 이렇게 몸을 걸어야 하는 출산을 어떻게 이기적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건지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1년에 두 번 정도 가족들이 해외여행을 가고, 인테리어를 깔끔하게 한 구축 아파트에 살며, 한국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없는 부부 합산 연봉 1억 5천 이상의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이성애자 남녀가 아니면 아이를 낳는 게 가난의 대물림이며,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이다. 물론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고, 다들 눈뜨기 힘든 아침을 이겨내고 있다는 걸 안다. 나 또한 그러니깐.
그렇기에 이런 댓글은 동성애 혐오라기보다는, 평균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를 보여주는 거라고. 어느 구성원과 어떤 형태의 가족을 이루든 우린 행복해질 수 있고, 마땅히 사랑받아야 한다. 노인, 여성, 동물,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성소수자,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살기 좋은 세상으로 걸음을 옮겨 가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이고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라고 믿는다. 매일 같이 행복할 순 없어도, 손잡고 살아가는 이 땅 위에 웃음소리가 잦아지면 참 좋겠다.
추신 ) 책이 전부가 아니라 입사 후 긍정적으로 변한 내면과 성 지향성을 받아들여준 원가족과의 사랑, 그리고 레즈비언의 출산 기사가 우리 부부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지면을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물론 책이 시발점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 독서는 아이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