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버스를 타고 창문에 머리를 얼마나 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미간을 구겨 애써 눈을 떠보았다. 눈을 뜨니 익숙한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내 볼 옆에 축축한 끈적임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코로나시국에 마스크는 나의 추례함을 가릴 수 있는 좋은 용도가 되었다.
어느덧 송도의 대표건물 O호텔이 보였다. 이 건물에 갈 때마다 대기업 다니는 것 같고, 좋긴 한데 이 형체를 보면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너는 뭐가 그렇게 하늘에 화났는지, 송곳처럼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 것만 같아 보이는가.
빨간 벨을 누르려 손을 뻗었다. 삑-
M버스 기사님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도착하자마자 끼익-하고 버스가 멈춰 섰다.
"하-. 멀다 멀어."
버스에서 내려 집을 바라보았다. 족히 20분은 더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평소에는 안 신던 구두를 신어 발과 발목이 아려왔다.
"지잉-지잉-"
아까 면접 볼 때 안내해 주던 팀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왜인지 모르게 나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유지은 씨 맞죠?"
"네,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면접에 통과하셨습니다."
"아, 벌써 결과가 나온 건가요? 감사합니다."
"네. 이사님이 마음에 들어하셔서 빠르게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저 혹시 지금 아직 근무 중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출근 가능하실까요?"
합격 연락을 받고 기쁨도 잠시, 나는 퇴사하고 잠시나마 쉬고 싶었던 나의 야심 찬 계획을 생각했던 터. 재빠른 판단으로 말했다.
"적어도 3주는 걸릴 것 같아요. 제가 맡고 있는 업무가 많아서요."
"그렇군요. 그런데… 3주는 어려운데, 좀 더 앞당길 수 없을까요? 안 그러면 어려워서요."
"아…. 제가 내일 출근해서 한번 요청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원래 저 면접 한번 더 본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보긴 합니다만, 이사님 마음에 드시면 상관 없는 거라서 편하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2번째로 보실 면접은 현재 영국에 계셔서 줌으로 진행될 예정이고요 일정은 메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우선, 합격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합격 연락을 받고 머리가 띵 했다. 그리고 의심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직을 하는게 맞나 싶기도 하고, 사기 전화는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갑자기 취소하면 어떡하지 싶기도 했다. 그리고 분명히 내가 면접을 보면서 병욱 씨가 백퍼센트 합격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분이 안한다고 한건가 싶기도 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 속을 지나갈 때 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해 팀장님께 미팅 요청했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은주임, 무슨 일이야?"
"아 네. 저 퇴사하려고 말씀드렸습니다."
"휴-. 왜 그러는 건가? 다시 생각해 봐."
"더 배우고 싶은 게 있어서, 이직했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같은 업계인데, 계약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어디에 있는 건데?"
"강남에 있어요."
"일주일도 못 다니겠구먼, 그냥 다시 생각해 보지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그래도 오래 다녔잖아. 그래서 딱 보면 알지. 일주일도 못 버티고 관둘걸?"
"하하. 아니에요."
나는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팀장님, 대체자 빨리 구해주세요. 저 2주만 하고 나가야 돼요."
"그렇게 빨리?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서 말씀드리잖아요. 빨리 공고 올려주세요."
"그래도 그건 너무 빠른데."
"전 퇴사자도 그렇게 하고 갔는데, 왜 저만 안 돼요? 저도 미룰 수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 퇴사 통보를 하고 나왔다. 사람 필요한 듯 구슬릴 때는 언제고, 이직한다니까 마치 내가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하다니…. 순간 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2주의 시간 동안 나는 초등학생도 알아볼 수 있게, 내가 담당하던 업무의 모든 프로세스를 캡처 및 주석을 달아 만들었다.
제발연락하지 마. 연락하지 마. 주문을 외우면서. 퇴사하면 연락하지 마라. 연락하면 죽는겨.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하게 다 썼는데 연락 오면 진짜 양심 없는 거야.
정확히 2주 뒤 나는 퇴사했다. 첫 회사의 퇴사는 허전했고, 섭섭했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설렘과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시작이 막막하게 두려웠다.
'그동안 감사했다.'라는 의미가 담긴 사진들과 편지를 나눠주고 그 길로 나는 회사를 나왔다. 퇴사 기념 여동생과 함께 퇴사 축하 파티를 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시체처럼 M버스를 타고 삼성역에 가고 있었다.
서울의 풍경은 다채로웠다. 뉴욕 맨해튼을 연상케 하는 테헤란로를 따라 높은 빌딩들이 빽빽이 있었고, 버스 운전기사 좌석과 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넓은 창의 포커스는 빌딩 사이로 보이는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빌딩 앞 겨울을 미리 준비하는 트리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햇빛 가리개를 걷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안과 밖의 온도차가 있어서 그런지 습기가 차 잘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손으로 박박 닦은 후 밖을 바라보았다. 계속 화면이 바뀌는 전광판들과 여러 빛을 쏘는 네온사인들로 나는 눈을 떼지 못하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지은 씨? 저는 해외팀 팀장 김동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제 옆 여기 앉으시면 되고, 소개는 이따 주간회의 때 하는 걸로 해요."
"네."
멀뚱멀뚱 컴퓨터 화면만 바라본 지 30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모든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 큰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팀장님이 지은 씨도 가시죠. 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회의가 진행되는 지도 몰랐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 김선자예요."
"안녕하세요!"
나는 면접 때 본 마녀 같은 선자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우리 팀이었다니. 분명 인사팀 이사라고 했는데? 왜 우리 팀인 거지 어리둥절 하고 있는 와중에 주간회의가 시작되었다.
"주간회의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번달 미국 예상 매출은 총 8억이고, 저번달은 5억으로 마감하였습니다."
미국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이 발표했다.
"어머, 저번달 보다 이번에 많이 가져갔네~ 영업 잘했나 보네~ 모두 박수!"
선자 씨의 피드백에 모든 팀원들은 박수를 쳤다.
"인도네시아는 3억으로 예상되며, 이번달 12호점 오픈예정에 있습니다."
"네, 다음 하세요."
이번에 선자 씨는 그냥 피드백 없이 넘어갔다.
"필리핀은 2억으로 예상되고, 이번달 23호, 24호점 오픈 예정에 있습니다."
"왜, 2억밖에 못해요? 두 개 오픈하면 4억은 해야지."
"이사님, 저번달에도 얘네들이 많 이가져가서 지금 재고가 너무 많대요. 그래서 저번에 가져간 재고 때문에 이번에도 무리해서 가져가는 거라서 그래요 이사님. 이건 이따 따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네. 따로 보고 하세요."
긴장감 속에 어떻게 진행 됐는지 모르겠는 주간보고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여러분, 이번에 저희 해외사업팀에 새로 온 유지은 씨예요. 환영해 주세요. 박수!"
다들 선자 씨의 명령에 따라 손뼉 쳤다.
"안녕하세요. 유지은입니다. 앞으로 이커머스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 이제 여러분도 돌아가면서 간단하게 자기소개해 주세요."
선자 씨가 이번에는 팀원들의 소개를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동남아에서 미얀마, 인도네시아를 담당하는 김혜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그 외 등등을 맡고 있는 감수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온라인을 담당하고 있는 방진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수출신고 및 출고 담당하고 있는 김희남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해외팀에서 매출 및 영업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송주림입니다."
돌아가면서 소개할 때,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팀원들의 얼굴을 봤는데, 다들 선하게 생겼다.
"자, 이제 업무 하러 가세요. 팀장님! 잠깐 저 좀 봐요."
선자 씨는 회의의 끝을 알리고 동수 팀장을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