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믿는가

1화 어른들은 믿음에 절박하다

by 천윤준호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믿는다.

사랑을 신앙하고, 잔혹한 세상 안에서도 하찮은 사랑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타인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잘못된 믿음을 제외한 모든 믿음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믿음은 대개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공포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이유를 찾도록 설계되었다. 이유가 없다는 사실보다 잘못된 이유라도 있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선택한다. 침묵하거나, 의미를 만든다. 우리는 거의 항상 후자를 택한다.


- 인간은 고통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통 그 자체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그 고통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가능성이다. 역사적으로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반복해서 확인되는 사실은 이것이다. 인간은 침묵보다 허구를, 무의미보다 잘못된 의미를 선택해 왔다.

이는 문화적 습관 보단 생존 전략에 가깝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생존 전략)

- 집단적 재난 이후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의미 생성

중세 유럽의 흑사병은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한 재앙.

의학적 설명이 불가능했던 이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세균이라는 원인이 아니라 신의 분노라는 설명을 선택했다. 이 설명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기능적이었다.

(까뮈의 페스트를 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신의 분노라는 서사는 '왜 착한 사람도 죽는가'에 대한 공포를 '우리가 충분히 속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바꿔주었다. 이때 인간은 침묵하지 않았다.

이유 없음이라는 공포의 공백 대신 도덕적 서사라는 의미 구조를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이 해석이 실제로 사회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잘못된 이유는 혼란을 통제했다.


하지만, 좋은 믿음의 결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에 의거한다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까뮈의 글에선 아무런 죄가 없던 신부의 아이가 죽게 된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세균에 감염되었던 것일 뿐. 이 사례는 믿음이 일종의 혼란을 막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그 이면은 안쓰러운 결과만 있을 뿐이었다.


믿음은 그래서 일종의 구조물이다.

무너지는 세계 위에 급하게 세운 임시 가설.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난 이유와 이 고통이 나를 지나가는 목적, 이 상실이 끝이 아니라는 증거. 믿음은 진실이기 전에 버팀목이다.


아이들은 믿음에 빠르다.

어른들은 믿음에 절박하다.


어릴 때의 믿음은 놀이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상상하고, 약속 없는 내일을 기다리는 일. 그러나 어른의 믿음은 생존의 기술이다. 더 이상 우연으로만 살아갈 수 없을 때, 인간은 세계가 나를 향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버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다.

신을, 사람을, 사랑을, 미래를, 혹은 나 자신을.


흥미로운 건 믿음의 대상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건 믿고 있는 '상태' 그 자체다. 물론 조금 더 깊게 간다면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믿음 전의 나의 선택, 상황과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삶을 견디기 위한 자세이며, 현실을 해석하는 렌즈다. 같은 사건도 믿음이 있으면 시련이 되고 믿음이 없으면 해결 불가능한 재난이 된다.


믿음은 고통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고통이 무작위라는 생각을 지워준다.


인간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아픔이 아니라, 무작위성이다.

왜 나인가, 왜 지금인가, 왜 이런 방식인가. 이 질문에 아무 답도 없을 때,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믿음은 이 질문에 임시적인 문장을 제공한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해될 것이다. 이 고통은 낭비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


이 문장들이 사실인지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중요한 건 그 문장들이 오늘 하루를 넘기게 해 준다는 점이다.


믿음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정확히 인식했다는 증거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무언가에 기대기 시작한다.

그 기대가 종교가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하고, 사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한 사람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왜 믿는가.

진실을 알아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답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택은, 무너진 뒤어야 시작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Z 덕분이다.

그녀의 말이 나를 조금씩 믿음으로 이끌고 있다.

설명되지 않는 밤이 오면 이제는 침묵을 선택하지 않아보려 한다.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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