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의 여름 방학이 시작된 후, 아들은 로컬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국제학교에 여름 캠프가 있긴 하지만, 가격 대비 프로그램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어 다른 옵션을 찾아보았었다. 싱가포르에서 유명한 여름캠프가 있긴 하지만, 너무 멀어 등하교가 힘들었기에 안타깝지만 그 옵션은 포기했다.
그렇게 대안으로 찾은 로컬 유치원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싱가포르에 오래 산 친구가 이 유치원의 다른 지점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해 믿음이 갔던 것이 크지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픈한 지 3년밖에 안된 지점이 위치해 있다는 점, 한국 엄마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 체인 유치원과 견주어도 커리큘럼이 뒤처지지 않고, 가성비가 좋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너무 동네의 찐 로컬 유치원 같지도 않다는 점 등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는 아들에게는 한 달 전부터 계속 이야기했다.
"지금 학교가 방학을 하면, 여름 캠프가 시작될 거야.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와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서 신나는 여름 방학을 보내는 거지~"
"엄마. 왜 꼭 여름 캠프를 해야 해? 난 그냥 놀고 싶은데?"
"싱가포르에서는 여름에 원래 여름 캠프를 하는 거야. 중국친구 닉은 중국에서 여름 캠프를 하고, 일본친구 료는 일본에서 여름 캠프를 하는 거지. 싱가포르에 있을 때는 싱가포르 여름캠프를 하는 거야"
"힝... 싫은데...."
엄마의 독단적 결정과 새하얀 거짓말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길고 긴 여름방학을 아들과 나 단둘이 하루 종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로컬 유치원은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국의 키즈노트 같은 앱을 통해 선생님의 공지가 뜨고, 오늘 어떤 수업을 했는지 사진이 올라왔다.
매일 두 시간 영어 공부를 시켰고, 한 시간은 중국어 수업을 했다.
영어 시간에는 주어, 동사를 배웠는지 주어, 동사를 분류한 워크 시트가 집으로 들려왔고, 매주 금요일에는 영어 단어 시험이 있다며 8개의 단어와 1개의 문장을 외워오라는 주문도 받았다.
중국어 수업은 국제학교의 중국어 수업과는 다르게, 중국 원어민(?) 선생님이 100% 중국어로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영어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중국어 수업을, 아들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 했다며 수업이 한 3시간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전형적인 싱가포르 선생님으로, 따뜻함보다는 엄격함이 느껴지며 싱가포르 억양이 여전히 있었다. 아들은 선생님 말이 너무 빨라 잘 못 알아들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냥 Yes Yes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아마 싱가포르 억양이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날 울면서 등원했던 아들은, 하원할 때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나오자마자 쉬가 마렵다며 화장실을 갔다. 유치원의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몰라 하루 종일 쉬를 참았다고 했다. 아들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 종일 쉬를 참았다. 첫날은 화장실이 어딘지 몰라서 못 갔고, 다음날은 정해진 시간에만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그 시간에 영어 워크시트를 끝내느라 못 갔다고 했다. 그다음 날은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가기 싫어 참았다고 했다. 화장실에 가기 싫어 싸준 물도 거의 안 마셨다고 했다.
점심은 죽, 완탕면, 새우 볶음밥 같은 현지식이 제공되었다. 치즈스틱이나 주먹밥도 간식으로 제공된다고 했다. 국제학교의 햄버거, 파스타류의 점심에 익숙한 아들이었지만, 다행히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아들은 아직 친구들의 이름을 아직 다 익히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하원 때 어떤 친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잘 자가라고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새로운 친구들과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아들은 오늘 감사한 점으로 '친구들을 little bit 사귄 것'이라고 했다. 기특했다.
나 역시 새로운 유치원 덕에 감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들과 등하교를 하는 30분의 버스 여행이다. 유치원은 집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이긴 하지만 정류장에서 걷는 거리들이 있어 왕복 넉넉히 30분은 잡아야 한다. 스쿨버스를 이용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여름 방학에만 단기로 등록한 아들에게 스쿨버스의 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마다 아들과 함께 버스 등교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바깥 구경을 하다가 정류장에 내려 유치원까지 걸어가는 30분. 그리고 아들을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30분. 이 왕복 1시간의 시간은 참 소중하다.
아침에 버스를 탈 때면, 아침 특유의 선선한 공기와 햇살, 출근하는 인파의 적절한 긴장감, 좋아하는 버스를 타서 한껏 신이 난 아들의 밝은 에너지는 온종일 나를 행복하게 했다. 평소 아들손을 잡고 학교까지 걸어갔던 10분의 등굣길과는 또 다른 행복이었다. 이상하게 출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분 나쁘지 않은 긴장감이었다. 그리고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내의 큰 슈퍼에서 동네에는 없는 과일을 장 봐서 가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오후에 아이를 데리러 나가는 30분은, 나에서 엄마 모드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만에 아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버스를 타고 가며 아들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면 또 다른 설렘이 생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하원길에 쇼핑몰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이틀 동안 울먹이며 등원하는 아들을 보며, 낯선 환경에 뚝 떨쳐놓은 것이 못내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강한 로컬의 문화에 노출되어 자립해 나가는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아들은 오늘은 금요일이라 하원하고, 유치원이 있는 쇼핑몰의 커피숍에서 숙제를 하고 저녁으로 외식을 한 다음, 오락실에 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포켓몬 게임까지 하고 오겠다고 했다. 낯선 환경에 나름의 방법으로 적응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 나가고 있는 아들에게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