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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심은 데서 F 나기도 한다

by 세상에

MBTI를 그리 운운하는 편은 아니며 사람의 성향을 16개의 타입으로 나누는 것이 적절할까에 대한 의구심은 늘 있지만, 굳이나 내 성향을 MBTI화 하자면 ISTJ이다. 남이 아닌 나를 통해 에너지를 받고(I), 구체적인 사실(S)과 논리적 판단(T)을 중시하며, 이에 따라 계획적인 삶(J)을 꾸린다. 여행을 갈 때에는 미리 자료 조사를 하고 계획을 짜며, 여행을 가서는 혼자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뭐 그런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성향은 입금 전후, 사회화된 또 다른 자아로 표출되기도 한다. 회식 때 술잔을 들고 테이블을 돌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직원들이 상담을 하면 진심을 다해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에너지를 받는 E 성향이거나, 타인의 감정을 먼저 헤아리는 F의 성향이라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E나 F는 어쩔 수 없이 조직생활에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나인 것으로 사료된다.


남편은 나보다 더 사회화가 되었기에 그의 MBTI를 정형화하기는 어렵지만, 10년간의 관찰에 따르면 그는 ENTP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을 통해 에너지를 받고(E), 전체적인 개념을 중시 여기며 (N) 논리적 판단(T)을 하지만 유연한 대처(P)도 가능한 사람이다. 이 중 남편은 확신의 T이기에, 또 다른 T인 나와 논리적으로 부딪힐 때도 많지만, 10년간의 부부생활로 학습화된 F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에고, 그렇구나.. 뭐가 힘들었어?'라고 다시 물어본다던지, 내가 A가 좋을지 B가 좋을지 고민하고 있으면 '정말 고민되겠다... 나도 고민된다야...'라고 딱 거기까지만 이야기한다던지, 학습된 입력값에 따른 적절한 출력값을 내어 부부간의 대화 시 향상된 공감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T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만 5살 우리 아들은 신기하게도 공감 능력에 뛰어난 F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이상하게 빈혈기가 많이 돌았다. 하교 후 놀이터에서 앉았다 일어나는데 머리가 핑 돌고, 놀이터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뭔가 찡한 것이 힘이 쭉 빠졌다. 한껏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싱가포르의 날씨 때문인지, 10일간의 아들 수족구/중이염 병시중에 내가 기력이 쇠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놀다 아들과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부랴부랴 저녁을 지어 먹이고, 설거지를 하는데 또다시 힘이 빠지고 어지러우려고 했다.


"아들아. 이상하게 오늘 엄마가 많이 힘드네.. 어질어질하고 힘이 없어"

저녁밥을 잘 먹고 레고를 맞추고 놀고 있는 아들에게 하소연을 하며 설거지를 계속했다.


잠시 후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그룹 잔나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엄마. 엄마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힘내!"

그러고서는 쪼르르 달려와 팔에 뽀뽀를 쪽 해주고서는 시크하게 돌아섰다.


저녁을 먹으며 태블릿으로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았는데, 아들은 힘없이 달그락거리는 나의 뒷모습을 보며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노래로 바꿔 놓았던 모양이다.

5살 아들이 엄마를 생각해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를 태블릿으로 틀고, 만들던 레고를 멈추고 뽀뽀를 하러 올 생각을 했다 떠올리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힝... 아들아 너무 고마워. 네가 틀어준 노래 듣고, 힘나는 뽀뽀받으니까 엄마가 정말 힘이 난다..(훌쩍훌쩍)"


손에 설거지 비누물을 가득 묻히고 자기를 바라보며 훌쩍이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아들은 쪼르륵 달려가 손수건을 집어 키도 안 닿는 내 얼굴을 닦아 주려고 까치발을 세웠다.

나는 얼른 손을 씻고 아들을 꼭 껴안고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 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내 모든 사랑을 다 준 아들과, 자신의 모든 사랑을 나에게 아낌없이 준 아들.

내가 힘들어 보이면, '엄마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먼저 물어봐주는 아들.

내가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누워봐. 엄마가 내 다리 주물러 주듯이 내가 엄마 어깨 주물러 줄게' 하는 아들.

'엄마는 화장해도 안 해도 이뻐'라고 찡긋 웃는 아들.


어디서 이런 F 아들이 나왔나.

T 엄마는 F 아들덕에 또 힘을 내서 산다.


하늘.jpg <달이 예뻐서, 별이 반짝반짝 빛나서 손으로 잡고 싶다는 아들. T 심은 데서 F 나기도 한다>
happy.jpg <우리 앞으로도 계속 함께 손 잡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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