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전부터 계획했던 여름휴가였다.
한국에서는 갈 엄두가 안 나고, 싱가포르에서는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곳.
우리 세 가족이 편히 쉬면서도 나름의 액티비티가 있어 신날 수 있는 곳.
그렇게 고심 끝에 정한 목적지는 인도네시아의 길리섬과 발리였다.
윤식당 촬영지로도 이미 알려진 길리섬은 거북이, 스노클링, 해변과 석양, 그리고 자동차가 없는 섬으로도 유명했다. 비행기, 스피드보트, 페리, 마차, 자전거 등 다양한 탈거리만으로도 어린 아들의 호기심은 충분히 충족될 수 있었다.
많은 고민 끝에 길리섬의 숙소는 섬에서 몇 안 되는 고급 리조트로 예약했다. 바닷가에서의 4박이 아들에게 지루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다. 그래서 모래놀이 장난감과 스노클링 장비, 그리고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한다는 점과 리조트 내 다양한 액티비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리조트를 예약할 이유는 충분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 시 묵는 고급 리조트였다.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길리는, 조금 실망이었다.
너무 준비를 많이 했던 탓일까? 너무 많은 여행 후기를 봤던 탓일까?
몰디브 같은 바다를 상상했고, 나트랑에 묵었던 리조트의 다양한 호텔 액티비티를 기대했다. 더군다나 작은 수영장이 딸렸던 독채 숙소에는 와우 포인트가 없었다. 나의 선택에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들은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바닷가 모래 속에서 뒹굴거렸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섬을 쌓고 부수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잠이 오면 선배드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런 아들을 보며 책을 읽었다.
우리 가족은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았다. 하루는 전기 전동차를 빌려 셋이서 함께 타고 달리기도 했다. 가다가 멋진 해변이 나오면 자전거를 멈추고 한참을 놀았다.
모래가 가득한 발을 숙소 앞 항아리 물로 씻고, 삐걱 거리는 나무 바닥을 지나 야외 샤워실에서 샤워를 했다. 후드득 모래가 수영복에서 떨어졌다. 야외 샤워실의 시원한 바람에 낭만이 차올랐다.
뒷마당의 쨍한 햇볕에 수영복과 옷을 빨아 널었다. 빨래에서 나무 냄새가 났다.
리조트 내 마련된 다트판은 아들과 남편의 차지였다. 매일 두 번씩 두 남자는 다트 대결을 했다.
나와 아들은 돌로 만든 체스를 뒀다. 아들과 나만의 룰로 하는 체스지만 늘 박진감이 넘쳤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밤이 되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쏟아졌다. 그렇게 밤하늘을 매일매일 올려다봤다.
점점 길리가 사랑스러워졌다.
아쉬운 길리를 뒤로한 채, 쾌속선을 타고 발리로 향했다.
지난번 친정부모님과의 발리가 애틋했기에, 남편과의 발리도 한껏 기대했다.
특히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크고 유명한 리조트를 예약한 터라, 어떤 곳에서 머물게 될지 상상했다.
하지만 너무도 자연에 푹 빠졌던 길리에서의 5일 여파였을까... 수영장이 여러 개 있고, 최신식 현대 시설의 대규로 리조트는 멋이 없었다. 거대한 상업공간이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은 정이 없었고, 길리에서의 새소리, 파도소리, 마차소리가 그리웠다. 리조트의 화려한 불빛 덕에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리조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든 택시를 타야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발리의 고급 대형 리조트를 낯설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아들은 여러 스폿의 수영장을 돌아다니며 다이빙을 하고, 미끄럼틀을 수십 번 탔다.
바닷가에 마련된 에어바운스에서 땀이 나도록 오르락내리락했다.
해변에 있는 탁구대, 고리 던지기, 젠가를 하며 한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키즈카페가 잘 되어 있었지만, 아들은 그곳에 딱 한번 가고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밖에서 노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아침 뷔페와 다양한 옵션이 있었던 저녁식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한식이 그리웠던 나는 아무도 먹지 않던 비빔밥을 매일 아침 먹었다.
저녁밥을 먹고서는 바닷가를 걸었다. 리조트에 성대한 결혼식이 있는지 폭죽이 터졌다. 밤하늘이 빛났다.
점점 발리가 재미있어졌다.
그러다 남편은 한국으로, 아들과 나는 싱가포르로 각각 헤어졌다. 공항에서는 우리의 이별이 가슴 아파 아들과 난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은 애먼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지만, 우리 셋은 애틋했다.
뭐든 편해지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휴식에도 준비가 필요했다.
좋아질 만하면 떠나니 서운하다는 나의 볼멘소리에 남편은 그런다.
인생도 그런 거라고.
이승이 좋아질 만하면 떠나는 게 사람이라며, 그러니 지금은 충분히 즐기라고 했다.
길리. 발리. 여기... 우리가 함께 있어 행복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