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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인생

by 세상에

아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도 조르길래 진열대에 있는 싸구려 큐브 하나를 사줬다.

자신의 사촌형이 예전에 한참 가지고 놀았던 것을 봐왔던 아들은, 자기도 사촌형아처럼 할 수 있다며 큐브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큐브를 맞추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우리는, 가장 먼저 유튜브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양한 유튜버들이 저마다의 가장 쉬운 공식을 내걸며 신나게 설명을 했다. 초딩버전, 가장 쉬운 버전, 외우기 쉬운 공식 등등 섬네일이 화려했다.


첫 단계는 십자가 만들기였다.

별다른 공식 없이 큐브를 이리저리 돌려 흰색으로 십자가를 만들면 되는 것이라 유치원생 아이도 한참을 궁리하다 십자가를 만들어냈다. 나도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다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큐브알이 십자가 자리로 쏙 들어가는 쾌감을 느끼고 난 후부터는 큐브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단계부터는 각종 공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올돌내돌, 돌올돌내 돌돌올돌내.. 내반올시 등등등... 단계별로 공식이 복잡해졌다.

그러자 아들과 나는 우리의 싸구려 큐브를 탓했다. 유튜버의 큐브는 손가락으로 살짝만 밀어도 잘 돌아가는데, 왜 우리의 큐브는 이다지도 삐그덕 대는 것일까?

큐브의 손 맛이 안 난다는 핑계와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우리는 결국 큐브를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렇게 며칠 처박혀 있던 큐브를 나는 오늘 아침 꺼내어 들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들로 머리가 꼬여 있어 자꾸 릴스만 보며 시간을 죽이는 나를 보고 있자니, 스스로 너무 한심하여 큐브를 꺼내 든 것이다.


유튜브에서 가장 쉬워 보이는 공식을 알려주는 영상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공식이 점점 많아지고 복잡해졌다.

그래서 설명이 좀 더 자세한 다른 유튜버의 영상을 찾아보았다. 이번엔 말이 너무 많고, 다른 말로 표현한 공식을 단계별로 알려주었다. 올돌,,돌돌.. 내반..올시...... 암호와 같았다.

거의 포기하려는 순간 "트위스트 공식 하나"만 알면 큐브를 맞출 수 있다는 왕초보 엄마의 동영상이 눈에 띄었다.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비교적 느릿한 속도. 그 무엇보다 큐브 움직임의 원리와 기본을 초반에 길게 설명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큐브 개념을 설명하고, 움직임을 생각하게 하고, 그다음에 기본 공식을 적용시켜 8단계로 큐브를 완성시켰다.

물론 여러 번 반복해서 시청하고, 따라 하고, 변수를 고민하고, 꼬이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를 한참 반복했다. 그러다 두어 시간 만에 큐브를 드디어 완성했다.


단순하게 여러 단계의 공식만을 외워서 절대로 해결이 안 되었던 큐브가, 원리를 생각하고, 큐브가 이동하는 길을 이해하고, 변수가 생겨도 기본을 떠올리며 천천히 과정을 밟아가니 느리지만 정확하게 큐브에 맞출 수 있었다.


큐브 각 면의 정중앙에는 가운데 박혀 절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6개 각기 다른 색깔의 '센터 큐브'가 있다. 센터 큐브를 중심으로 나머지 조각들을 천천히 돌려가며 맞추면 6개의 면이 결국에 채워진다. 하지만 센터 큐브를 잊고, 무작정 방법만 외워 큐브를 맞추다 보면, 예외 발생 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공식이 대입되어야만 하는 형태로 자꾸만 짜 맞춘다.


내 인생도 그런 것 같았다.

무작정 방법만 외워 달려가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떤 그림을 만들어 가고 싶은지 잊게 된다.

대신 나의 본질을 생각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먼저 떠올리고, 그다음 차근차근 정석대로 차곡차곡 쌓다 보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온다.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게 없다고, 다른 사람보다 늦었다고, 다른 사람과 다른 방법이라고 책망하지 않아도 된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나의 본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까 말이다. 6개 각 면의 센터 큐브처럼 말이다...


<아무리 뒤섞인 큐브라도 센터큐브는 변하지 않는다. 나의 본질도 그러하다.>


<맞춰진 큐브가 좋았던 아들은 또 큐브를 흩트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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