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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Jan 15. 2024

제주도 호텔 신분상승 이야기

남편이 사장이 된 후 체감한 가장 큰 변화는 호텔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우린 한라산 중턱의 한적한 3성급 호텔에 묵었다. 한라산 등반이 목적이었기에 부대시설보다는 편안한 잠자리가 보장된 호텔이면 족했다. 인적이 드물었지만, 시내와의 접근성도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때 둘 다 몸살에 걸려서 제주 시내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링거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다음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에는 남편 회사의 계열사 호텔에 묵었다. 남편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오는 제휴 할인 공지를 보고 잽싸게 예약했었더랬다. 3성급 호텔이었지만 편안했다. 객실이 그리 많지 않은 호텔이었기에 숙박객도 많지 않았다. 아침 조식을 먹을 때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저녁때는 호텔 내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했고, 지하 스포츠 홀에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작지만 아담한 야외 가족 온천탕이 있어 마치 일본에 온 기분을 낼 수도 있었다. 두 살짜리 아들과 함께 했던 첫 제주도 여행이었기에 더욱 행복했다.


<제휴할인과 함께한 T호텔>


남편이 임원으로 승진하자 혜택은 조금 더 많아졌다. 계열사 호텔에서 쓸 수 있는 포인트가 지급되었다. 그래서 유명 건축가가 디자인 한 5성급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고급진 호텔에 묵었다. 예전 제주도 여행 때 디자인을 구경하러 입구에만 가봤던 호텔이라 그곳에 묵는다는 것은 나에게 상당한 의미를 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별것도 없다고 했다. 특히 네 살짜리 아이가 묵기에는 할 일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고 했다. 걱정이 되었다. 아이와 긴 3박 4일을 어떻게 보내지... 하지만 기우였다. 상큼한 호텔 향기, 잘 가꾸어진 산책길, 새소리, 바람소리, 객실에서 뛰어 나갈 수 있는 앞마당, 히노끼 향 가득한 객실 내 온천.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장도 없고, 키즈룸 하나 없지만 그냥 객실에서 자고 쉬고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은 힐링이 되었다. 청포도 향기만 맡으면, 우리 아들은 그 호텔 향기가 난다고 아직도 이야기한다.

<청포도향 가득한 P호텔 뒷마당>


남편이 사장님이 되자 남편 회사에서 회원권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 타운하우스에 묵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고급진 대명콘도라고 했다. 감이 오지 않았다. 대명콘도가 고급져봐야 얼마나 고급지다는 이야기인가. 체크인을 하는 순간 알았다. 이곳은 우리 같은 여행객들이 민폐를 끼칠 수 있는,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고급 타운하우스라는 것을 말이다. 객실 문을 여는 순간 다섯 살짜리 아들과 나는 환호를 했다. 산방산과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와 넓은 거실, 식기세척기와 건조기까지 풀옵션으로 들어온 가전제품, 꿈에 그리는 아일랜드 주방. 밤이 되면 산 중턱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발코니에 앉아 있으면 달이 머리 위에 떠 올라왔고, 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박혀있었다. 아이가 놀 수 있는 수영장과 사우나까지 있으니 제주 시내로 나가지 않아도 하루가 짧았다.

<생태공원을 끼고 있는 B 타운하우스>


"여보, 사장님 오래오래 해라. 이런 좋은 호텔에서 묵어보기도 하고 말이야"

"에휴, 그럼 뭐 해. 내가 은퇴할 때면 우리 아들내미는 이렇게 좋은데 온 것을 기억도 못할 텐데"

"그렇네, 우리 아들램이 철들 때면 우리 둘 다 별거 없을 때라, 이 녀석이 기억할만한 좋은 것도 못 누리겠다"


우리 부부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가끔 연예인들이 TV에 나와 어렸을 때 부유했지만 가세가 기울었다, 뭐 그런 짠한 이야기를 털어놓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에잇,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면 뭐 하나. 즐길 수 있을 때 그냥 충분히 즐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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