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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May 13. 2024

이렇게 뒤통수를 치나요

노동부 진정이 미치는 영향

"어이 김 부장, 노동부에서 우편물 왔는데?"


노동부에서 우편이 올 때에는 뭔가 꼭 일이 있다. 노동부 감사를 준비하거나, 자료를 제출하거나, 무슨 사건이 신고되거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편을 열어보니, 며칠 전 퇴사 한 박 xx이사님이 임금 체불로 회사를 신고한 것이었다. 뭐라고? 박이사님이? 임금체불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접수인이 박이사님이라는 것이었다.


두어 달 전 박이사님의 퇴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평범한 퇴사는 아니었다.

영업팀에서 근무하던 박이사님은 대리점 영업을 담당하셨다. 대리점 영업이라는 것이 손이 많이 간다. 외국계 기업의 영업이라 계약서나 절차가 본사의 가이드 안에서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계약서 자체가 영문이며, 계약서 조항을 바꿀 때마다 본사의 승인을 하나하나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대리점 사장님들께서는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절차나 과정보다는 당신들이 그동안 해 던 사업의 직감에 따라 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대리점 영업을 하는 영업팀 사람들은 통역사 역할을 하기도 하고, 법무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대리점 사장님들과 형동생 하며 친분을 쌓아야 한다.


박이사님이 관리하던 대리점들의 실적은 꾸준했다. 함께 다니던 팀원 김 과장도 바지런히 영업을 챙겼다.


언제부턴가 대리점에서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기본적인 계약 이외의 내용들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대리점 관련된 계약서를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아뿔싸!

대리점 계약서 내에는 회사 표준 계약서 이외의 문구들이 교묘하게 들어가 있고, 박이사님 이름만으로 사인된 이면계약서가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업을 20년이나 해온 박이사님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대리점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단순히 박이사님만 관여된 것이 아니라, 영업 담당을 하고 있는 김 과장도 이 이면계약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새로운 제품이 나오며 본사로부터 매출에 대한 압박이 많았다.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왔던 대리점에게 마냥 업을 감행하기 어려웠던 박이사님과 김 과장은 대리점의 생리를 고려한 이면계약서를 만들어 왔고, 나름의 관리로 본사에 들키지 않고 매출을 잘 만들어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면계약 내용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결국 대리점들의 불평 그대로 본사에 보고되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는 징계 위원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20년 이상 회사를 다닌 박이사님은 불명예스럽게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를 원치 않으셨고, 징계 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사를 하셨다.


"김 부장, 참 창피스럽네. 회사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회사를 위한 일이 아니었어. 그냥 사직서 제출할 테니 빨리 정리해 주게. 그리고 우리 팀의 김 과장은 큰 잘못이 없어. 내가 시킨 일을 한 거야"


박이사님이 잘 못 하시건 확실하지만, 왠지 모를 안타까움은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꼼꼼하게 퇴사를 챙겼다. 퇴사 처리가 완료된 후에는 개별적으로 연락드려 잘 마무리되었음을 알려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임금체불이라니.... 그것도 노동부를 통한 진정이라니......


진정서의 요는 지난 3년간 사용하지 못한 연차를 보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증빙으로는 연차를 사용한다고 했던 x월 x일 실제 일했던 이메일이나 고객을 만났던 회의록 등이 첨부되었다.

직장인에게 연차는 매년 발생한다. 연차 사용 촉진등의 과정을 통해 연내에 사용하지 못한 연차는 소멸되기도 하지만, 법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절차가 미흡할 경우 직원은 과거 3년 동안 사용하지 못한 연차를 청구할 수 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영업의 경우 외근도 많고, 출퇴근이 사무직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워 연차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 않을 때였긴 했다. 회사 관리의 문제점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이야기했던 박이사님 3년 전 이메일 기록까지 꼼꼼히 첨부하며 노동부에 임금체불로 진정하다니. 나에게 명예롭게 퇴사하고 싶다, 그리고 끝까지 팀원을 챙기던 그 박이사님이, 퇴사 전3년 전 기록을 프린트하고 계셨을 것을 생각하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던 박이사님과 완벽히 다른 박이사님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회사는 연차 관리에 더 신경을 썼고, 나는 직원과 나누는 모든 말에 감정을 담지 않기로 했다.

직원이 나에게 따뜻했다고, 인사팀 업무에 따뜻하지는 않다. 직원이 나에게 친절했다고, 인사팀 업무에 관용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직원과 나의 관계 혹은 직원과 내가 나누었던 말과는 별개로. 나는 인사 업무를 행하는 사람이면 되는 것이었다.


인사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찰과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관찰과 관심에 나의 감정이 섞일 필요는 없다. 이 일 이후 난 드라이한 인사팀 팀장이 되었다. 물론 직원들 앞에서 입으로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가슴은 차갑다. 그래야 내가 일을 더 잘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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