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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름 Feb 10. 2022

02 독일의 길은, 자전거로 달려봐야 안다

오늘은 뮬베르그까지 자전거로 44km

 바이마르에서 톤도르프까지 23km를 자전거로 달렸다.

자전거로 달리면서 보이는 독일의 풍경들. 물결치는 보리밭 혹은, 밀밭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독일은 현실 같지 않다. 동화 속도, 실제도 아닌 뭔가 좀 헛갈리는 곳.


자전거로 누비고 있는 독일은 어디에도 꽃과 식물과 나무들이 있다. 독일의 꽃들은 무엇보다 자연스럽다. 정형화된 한국의 꽃더미나 다발과 다르게 독일의 꽃들은 질서 없이 뒤섞여있고 꾸미지 않는데 민낯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독일에 와서 '꽃'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꽃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 가치는 당연히 돈을 지불하고 매주 꽃집을 들랑날랑하게 할 만큼)


이상하게 들판을 둘러봐도 어디에도 사람이 없다. 농사는 누가 짓는 것일까.

독일어를 못해도 밭에서는 일할 있지 않을까, 제주도에서 당근이나 무를 뽑는 일은 외국인도 가능하던데 말이다. 마침 헬기가 지나가며 농약을 뿌린다. 그래서 한국처럼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는 거구나. 기계로 대량으로 농사를 짓는 독일에서는 나 같은 쓸데없는 인력은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도 가장 아쉬운 것은 독일어를 제대로 배워 식당에서 설거지라도 해봤어야 했다는 후회) 아무튼 노동자의 입장에서 독일은 아주 편리하고 효율적인 나라인 것은 확실하다.

걷는 것과, 자전거로 지나는 풍경은 모두가 좋다. 속도의 차이만큼 보이는 게 달라서 더 즐겁다. 우리는 걷기와 자전거 타기 모두 좋아하는데 이런 고난이도의 장거리 여행에서는 주변을 돌아보는 체력까지 남겨두려면 자전거가 낫다.(여기서 '걷기'는 3시간 이상을 이야기함)


호엔펠덴에서 리히하임까지 3km.   

평소 숫자나 거리나 방향에 감이 없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고서야 남편에게 이것저것을 묻는다. 


3km는 자전거로 몇 분이야?

어디가 북쪽인 거야?

지도에 내리막 오르막이 표시되어 있어? 


남편은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자전거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자만할 때쯤 오르막이 시작되었고 마음은 무참히도 바뀐다. 오르막처럼 헉헉거리는 나의 숨도 원망스럽다. 남편이 굳이 나를 끌고 온 여행이 아니며 그가 나를 훈련시키려고 오르막을 찾아 길을 일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지금, 남편이 마침 곁에 있다. 

독일의 7월, 뜨거운 오후를 걷는다. 땀이 흐르고 옷이 젖는다. 땀방울이 떨어져 길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내 생애 가장 큰 배낭을 메고, 자전거 좌우에는 대롱대롱 짐을 가득 달았다. 싸구려 신발을 질질 끌다가 힘이 떨어지자, 다리가 꼬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을 그래도 간다. 아니 '가야 한다'가 맞겠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 언덕은 넘어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끌고서.


30분을 넘게 오르막을 올라가다 보니, 이제 땀방울보다 눈물이 더 많아진다.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옹알이들이 스멀스멀 애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다. 이게 무슨 여행이야. 개고생이지.

다 때려칠꺼야. 자전거고 뭐고.

어제 발 다쳤을 때 집으로 돌아갈껄. 미쳤어. 내가.

오빠는 자기 혼자 고생하지, 왜 나까지 이렇게 만들어?


가슴 한가운데에서 쓰욱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 누구도 욕하지 않을 것처럼, 죄가 없다며 손을 씻는 빌라도처럼 나는 고고했다. 그리고 허영의 옆구리가 푹 찔리자 진실한 척, 선한 척들의 형체는 무너져 내렸다.

결국, 나는 자전거를 팽개치고 독일 길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 흐느끼거나 찔끔찔끔의 수준이 아니라 대성통곡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체력이 바닥났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지금 몸의 마지막 힘을 다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으니까.


엄마, 힘들면 우리 쉬었다 가자.

 

네 살 까망이 아이가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딱 한마디 말만 하고서 곁에 있는 것으로 엄마를 위로해 준다. 남편은 저만치 떨어져서 상황이 추스러지기를 기다린다. 어설픈 토닥임이 화를 불러일으킬 것을 아는 똑똑한 사람. 나는 한참 울다가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로 엉덩이를 털고 다시 간다. 내 걸음과 상관없이 독일의 저녁이 오고 있고, 우리는 머물 곳을 찾아야 한다.

자전거 하이킹 2일 차, 44km를 달려 뮬베르그로 가고 있다.

하루 내내 독일의 여름은 흐렸다 반짝였다를 반복하고, 가망 없던 오르막의 끝이 보인다.


흘린 땀방울과 눈물 덕에 단단했던 마음이 허물어졌는지,
오르막을 넘어서면서 검고 낡은 배낭에 패인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이틀을 자전거 타고 도를 터득한 것마냥, 오만한 착각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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