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장소는 화려한 도시의 중심 한강, (바쁜 현대사회에서 나 홀로 자전거를 타며 여유를 즐긴다는 우월감을 느끼며) 새로 산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만 입고도 따뜻한 날씨, 기분 좋은 바람에 아침부터 고데기로 공들인 컬을 날리며 다음 데이트 코스를 상상하는 것. 그러다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남편과 눈이 마주치고 왠지 설레서 미소를 짓는, 진부하다고 혀를 끌끌 차던 미니시리즈의 한 장면을 찍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강의 평지길이나 내리막 길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나는 전혀 몰랐다. 그리고 독일은 은근한 언덕이 끝없는 오르막길이 어마 무시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옷이나 머리에 신경은커녕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을 몇 시간 오를 것을 알았다면, 그 누구도 시작하지 않았을 자전거 여행.(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편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획했다. 무서운 사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튜링엔 주를 일주일 정도 돌기로 하고, 바이마르에서 오후 네시, 아이를 유치원에서 찾아서 출발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짐을 챙겨 자전거 마당으로 내려왔다. 내 자전거도 없어 갓 친해진 교회 자매 S에게 빌렸고, 자전거 옆에 다는 짐가방은 5층에 사는 J 집사님이 빌려 주셨다.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도 자전거에 다 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이런 짐 사이즈는 기차나 비행기를 탈 정도의 여행. 도저히 자전거에 다 싣지 못할 것만 같아 나는 얼굴이 구깃구깃해진다. 필요 없을 것 같은 내 옷을 몇 개 더 빼고, 화장품도 로션과 선크림만.
남편은 15kg 네 살의 우리 아이를 태워야 하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짐들을 고스란히 진다. 무거운 짐 대신 아이를 태워볼까, 하는데 남편이 일초도 망설임 없이 손사래를 치고, 나도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바로 꼬리를 내린다.(몇 번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 타기를 시도했으나 매 번 넘어졌고 다칠 뻔했던 아찔한 기억) 자전거 양쪽에 짐을 달고, 20kg 배낭을 멘다. 어깨가 빠직 내려앉고 이렇게 무거운 가방은 고3 이후 처음이다. 예상보다 벌써 자신이 없어진다. 아이만 신이 나서 야호! 를 연신 외친다.
바이마르에서 톤도르프까지는 연습 삼아 남편의 트레이닝 아래 가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힘든 길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전거에 올라타자마자 너무 무거운 짐 때문에 나는 휘청한다. 핸들을 꽉 잡은 손아귀는 한 방향으로도 가지 못하고, 술 취한 마냥 길을 이리저리 자전거는 기운다.
출발한 지 10분, 둔턱에서 걸려 나는 자전거와 짐들과 함께 넘어졌다. 20kg 배낭이 머리 위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자전거 옆에 주저앉아 발을 보니 까지고, 피가 난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전거 여행을 제안한 남편을 부른다. 피나는데 이제 어쩔 거냐는 듯이 시비 어린 말투에 앙칼진 목소리.
오빠, 나 다쳤다고.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남편은 뒤돌아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도 와서 도와줄 판에 남편은 쓰윽 한 번 보고는 아무 일 아니라는 무심한 눈빛만 남기고 가버렸다. 세상에, 그는 갔고 나는 남겨졌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역에서 귤이나 도라지를 파는 할머니를 봐도 애처로워 다 사주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아내가 다쳤다는데 이런 반응이라고? 당연히 와서 다친 곳을 봐주고, 짐을 챙겨주고 나를 토닥거려 다시 출발하게 해야 하는 건데 이건 차원을 넘어서는 시나리오다.
나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으으 아야 아야 아픈 티를 많이 내 보지만, 남편과 아이는 벌써 자전거로 한참을 가 버렸다. 엄마에게 울면서 안아달라고 하던 아이는 떠난 엄마를 보고야 현실 상황을 알아챈다. 그리고 울음을 그치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나는 아플 새도 없이 바로 짐을 챙겨 다시 자전거를 굴렸다. 계속 휘청이는 자전거, 복숭아뼈에서는 피가 흐르고 양말은 붉게 젖는다.
남편은 그저 갈 길을 갈 뿐.
그리고 욱신거리는 다리로 페달을 돌리면서, 남편을 따라가는 나.
(반드시 그를 잡아 이유를 묻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올랐던 듯)
체리 나무 아래 남편과 아이가 있다. 나는 다쳤다고 빠르게 세 번 연속으로 이야기하고 남편은 별 말없이 밴드를 붙여 준다. 자전거 여행이 끝날 때쯤 남편은 어려운 이야기 꺼내 듯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때 달려가 다친 나를 도와주었다면 안쓰러워했다면 자전거 여행은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라고, 다친 나는 아마 더 이상 못 간다고 아니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을지 모른다며. 듣고 보면 맞는 말인데 그의 미래를 내다보는 큰 계획은 좀 인간적이지 않고 삭막하다.
독일에는 이렇게 체리나무가 가로수로 있다. 한국에서는 한 팩에 만 원인데 독일에서는 길에서 원하는 만큼 따 먹을 수 있다. 6월쯤부터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체리는 여행 내내 우리의 즐거움이었다. 체리가 없었다면, 체리가 없었다면, 나는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못했을 것이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체리 때문에 자리를 펴고, 남편이 나무에 올라가 체리를 따 오면 아이와 함께 허기와 목마름을 채운다. 체리나무에게서 쉼 이상으로 스며드는 안식과 평화. 붉은 체리 열매와 푸른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뜨거운 빛.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 자전거를 타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땀이 흐르고, 다리가 아프다.
여행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시간. 그리고 입가로 흘러내리는 체리의 달고 단 붉은 물.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서 급히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지고 있는 풍경에 나는 머뭇거려지고,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돌아가기에 집은 너무 멀고, 이제 이 밀밭에 몸을 뉘이고 자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이 내 앞에 놓여있는 것. 아이 앞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자전거 여행을 내 입으로 시인하고, 짐을 싸고 준비한 까닭일까. 지는 해 앞에서 두려워지는 솔직한 심정을 감추며 노란 냄비를 꺼낸다.
추수 후, 밀밭에는 동그란 밀 더미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곁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다. 배고픈 아이에게 짜파게티를 끓여서 준다. 아이는 검정 라면이 맛있다며 다음에 또 해달라는 약속을 한다. 나도 한 입 해보니 기가 막히게 맛있다. 집에서는 그렇게 밥을 먹지 않던 아이가, 밥 먹는 시간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장난치기 일쑤이던 아이가, 아주 묵묵히 빠르게 먹는다. 씹어 넘기라고 등을 토닥여도 계속 먹기만 한다. 집을 나오기만 해도 고쳐 치는 것들. 나도 아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