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는 누군가와 글로 소통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독일이었다. 갓 엄마가 된 나는 '아가씨와 아줌마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니, '참 쓸데없는' 고민인데 계속 아가씨이고 싶은 아기의 엄마는 되지도 않는 몸부림을 쳤다.
'누구의 엄마'
그리고 '나' 사이.
귀여운 아기를 앞에 두고도 나는 홀로 처절해졌다. 보다못한 남편이 아기를 데리고 숲으로 산책을 나가곤 했고, 나는 늙어가는 시간을 한탄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 가져 온 돈이 다 떨어졌고 시댁과 친정에서 매달 받는 돈으로는 근근히 살아가기 벅찼다. 하루는 빈 손으로 나갔다가 아이가 사과를 보고는
"엄마, 사과 사주세요.
사과가 너무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데 1유로가 없어 사과를 사주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1,500원이 없다니. 우는 아이를 겨우 안고 집으로 걸어왔다. 버스비도 물론 없어 지나가는 1번 버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더 어려웠던 옛 시절을 겪어서 그리 놀랍거나 슬프지는 않았지만, 결혼하고도 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질 못함이 참 우울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나의 이야기를 곰곰히 듣더니 예상대로 '나 따라 유학와서 고생이 많지?' 이러한 위로나, 내 손 위에 그의 손을 포갠다던지 하는 액션 따위는 없었고, 현실적인 대안을 그답게 제시했다.
"우리 장사를 하자."
외향적으로 포장되어 있던, 실제로는 아닌 나는 주춤주춤거렸다. '장사라니, 누가?, 내가?'
그러나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에 우리의 사정은 너무 딱했다. 나는 아이에게 1유로의 '사과 한 개' 정도와 3유로 감자튀김 정도는 사줄 수 있는 엄마이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장사를 할껀데?"
"앤틱을 팔자. 독일커피그라인더, 독일 찻잔 이런거."
"근데, 그걸 누가 살까?"
"그야 모르지."
남편은 한국에 있는 절친 D에게 연락해 동업을 하기로 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블로그에도 앤틱 홍보를 했다. D오빠가 어렵게 보내 준 초기자본금으로(그 시절은 왜 그렇게 모두가 어려웠던지) 앤틱장사가 시작됐다. 우리는 벼룩시장에서 커피밀과 찻잔, 접시 등을 한 가방 사왔다. 조심히 그리고 깨끗하게 앤틱을 닦아 사진을 찍고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게시했다. 해외배송비를 감안하고 한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앤틱 가격보다 살짝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했다. 그리고 지금의 이름 CAFELADEN, 커피상점 카페라덴이 생겼다.
물건만 파는 블로그나 홈페이지는 매력이 없다며 남편은 나에게 '글쓰기'를 추천했다. 독일에서 본 것들을 이것 저것 다 써 보는건 어떻겠냐고. 사람들이 독일이야기를 읽다가 물건을 살 수 있고, 또 물건을 사다가 독일이야기를 읽고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앤틱'이 더 잘팔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참나물과 달래를 뜯으러 다니고, 독일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독일에서 사귄 할머니 댁에 놀러가기도 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앤틱을 사러 기차를 타고 옆 도시에 가면서 자연스레 독일 여행을 하고, 매주 앤틱을 닦고 팔고, 독일 관련된 글을 쓰면서 나는 서른 넘어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앤틱의 가치를 알아가는 이 과정들이 너무 즐겁다는 사실, 또 사람들과 소통하며 글 쓰는 것의 희열감이었다.
독일 커피밀과 찻잔, 접시의 마크를 연구하기 위해 독일어로 된 앤틱 책을 구입앴다. 나는 독일어사전을 찾으면서 앤틱의 역사를 공부했다. 100년이 넘은 찻잔과 50년 된 커피밀 마크를 보며 '오래된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앤티크는 그 존재 자체로 빛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독일의 이야기를 즐겨 들어주었고, 다음 글을 기대했다. 물론 앤틱이 불티나게는 아니었지만, 사과와 감자튀김을 사 먹을 만큼 정도는 팔렸다.
아련한 독일의 기억. 남은 앤틱들은 집 한 구석에 먼지 쌓인 추억처럼 놓여 있고, 아이와 맛있게 사 먹었던 감자튀김의 기억과 장사를 위해 썼던 '글'이 내게 남았다. 빛바랜 앤틱의 조각들 위에 살기위해 써 왔던 글들이 쌓여 오늘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