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가 아닌 여행자가 되고 싶어 진심으로
어느 날 아침, 지하철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허기진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배고픈 게 아니라 목마른 거였다. 지식에, 정보에, 새로움에.
앞서 이야기했던 그 '멈춤'의 감각. 그놈의 가장 교묘한 함정은, 우리가 멈춰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한다는 거다. 왜냐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느끼니까.
손에 든 이 작은 기계로 우리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읽고, 보고, 듣는다. 출근길엔 간밤의 뉴스를 훑고, 점심시간엔 주식 전문가의 10분짜리 요약 영상을 보고, 퇴근 후엔 AI가 추천해 준 다큐멘터리를 '저장'한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 헤맨다. 마치 갈증 난 사람이 물을 찾듯이.
분명 우리는 멈춰 있지 않다. 오히려 지식의 숲 속을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탐험하는 탐험가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루가 끝날 때쯤 내게 남는 건 지적 충만함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와 공허함이다.
뭔가 잔뜩 먹었는데 여전히 배가 고픈, 그런 기분.
나는 이런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바로 **'지식 유목민'**이라고.
목적지 없이, 더 새롭고 더 자극적인 지식을 찾아 정보의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 손에는 최신형 나침반을 들고 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지 못하는 이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지식 유목민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한때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즐거우면서도 두려웠다. 최신 영화, 새로 나온 책, 정치적 이슈, 경제 전망... 대화의 주제는 시시각각 변하는데, 혹시나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전전긍긍했다. 바보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공부했다. 아니, 공부하는 척을 했다.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책은 서평만 찾아 읽었고, 어려운 영화는 결말 해석 영상으로 '정복'했다. 그렇게 나는 '얕고 넓은' 지식의 대가가 되어갔다. 어떤 주제가 나와도 한두 마디쯤은 거들 수 있는, 꽤나 유식해 보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후배가 내가 추천한 책을 읽고 와서는 밑줄 친 문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그 책의 줄거리와 교훈은 알았지만, 단 한 문장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날 밤, 부끄러워서 잠을 설쳤다. 내가 쌓아 올린 지식의 성이 사실은 모래성이었다는 걸 깨달은 기분. 파도가 한 번만 쳐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나는 아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했을 뿐이다.
이것이 지식 유목민의 첫 번째 비극이다. 우리는 앎의 '깊이'를 잃어버렸다. 사유와 고찰의 즐거움 대신, 정보의 양으로 지적 능력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는 사이, 진짜 '나의 생각'을 만드는 근육은 점점 약해져 간다.
지식 유목민은 열렬한 수집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식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려 한다.
내 컴퓨터의 북마크 바를 보라. 이미 꽉 찬 지 오래다. '나중에 읽을 기사', '업무 관련 자료', '흥미로운 연구'... 언젠가, 아주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거라는 믿음으로 차곡차곡 저장해 둔 링크들. 마치 다음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내 스마트폰 사진첩에는 책의 좋은 구절을 찍어둔 사진이 수백 장이다. 다시 꺼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과 함께.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사진들 중 절반도 다시 본 적이 없다.
결제해 놓고 단 한 번도 완강하지 못한 온라인 강의는 또 어떤가. 1+1 할인이라는 말에,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조급함에 일단 사두고 본 '미래를 위한 투자'. 그 강의들은 지금도 내 수강 목록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다. 죄책감의 시선으로.
이쯤 되면 우리는 지식의 탐험가가 아니라 고물상 주인에 가깝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며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안고는, 정작 집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러운.
이 수집 행위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안정감을 준다. '나는 배우고 있어.' '나는 노력하고 있어.' '나는 뒤처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 저장된 지식들은 대부분, 우리의 뇌를 스치지도 못한 채 디지털 세상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오히려 그 쌓여가는 목록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은밀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압박감.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 지식의 수집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 모든 방황의 근원에는 아주 현대적인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지적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다.
나만 모르면 어떡하지? 이 책을 안 읽으면 대화에 낄 수 없을 거야. 이 기술을 모르면 도태될지도 몰라. 이런 불안감이 우리 가슴 한구석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든다.
불안감은 최고의 마케터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불안을 자극하며 새로운 지식을 팔아넘긴다.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 100선',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 '2025년을 지배할 메가트렌드'. 우리는 그 흐름에서 낙오될까 봐 두려워,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남들이 좋다는 것을 좇아 허둥지둥 달려간다.
알고리즘은 이런 우리의 심리를 정확히 파고든다. 내가 어쩌다 클릭한 영상 하나를 단서로, 비슷하지만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쉴 새 없이 눈앞에 대령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끝없는 정보의 미로 속을 헤매고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나침반'이 없었다. 내가 왜 이 지식을 알아야 하는지, 이 배움이 내 삶을 어디로 이끌어주길 바라는지, 그 근본적인 방향성이 없었다.
방향 없는 열심. 그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피곤하다. 몸은 편한데, 정신은 늘 녹초가 되어 있다. 정보의 과식으로 인한 지적 소화불량. 뇌가 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상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혹은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만들어낸,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세대도, 지금의 우리처럼 이토록 많은 정보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지식 유목민이었다. 성실했지만 길을 잃었고, 열심히 탐색했지만 공허했으며, 많이 알았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앞에서 우리가 느꼈던 그 '멈춤'의 진짜 정체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의 영혼은 성장을 멈춘 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 모두가 같은 사막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서로의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자. 당신만 이런 게 아니라는 걸, 나도 똑같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함께 첫 번째 질문을 던져볼 시간이다.
이 광활하고 막막한 정보의 사막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걸까.
답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믿는다. 지식 유목민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진짜 목적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자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