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귀신이 궁금하지 않아도 되는 굼벵이가 될 무렵
일요일 오후 세 시. 창밖에는 분명 계절이 흐르고 있는데, 내 시간만 멈춰 있다.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려봤지만 화면 속 세상은 그냥 소음이다. 읽으려고 쌓아둔 책들? 넘지 못할 산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해야 할 일도 없다.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이 완벽한 자유 속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니,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까먹어버렸다.
혹시 나만 이렇게 침대와 소파를 전전하며 휴일만 되면 굼벵이로 변하는 생물체인 건가?
모든 것이 괜찮은데, 아무것도 괜찮지 않은 기분. 심장은 뛰고 있는데 어딘가 멈춰버린 듯한 느낌.
이건 게으름 이랑은 좀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해내고, 너무 많은 길을 달려오느라 엔진이 과열되어 버린 자동차 같은 상태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칫솔을 입에 문 채로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매일 보는 내 얼굴인데, 그날따라 참 낯설더라. 저 사람은 누구지? 웃고는 있는데, 정말 행복한 건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답을 찾는 법을 까먹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지 않게 된 때가
어릴 적 내 별명은 '질문귀신이었다. 하늘은 왜 파란지, 개미는 왜 줄을 서서 걷는지, 세상의 모든 것에 물음표를 달고 다녔다.
꼬마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온통 신비롭고 경이로운 보물섬이었다.
그러다 어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후로는 세상은 정답이 정해진 시험지가 됐다. '왜'라고 묻는 대신, 정해진 답을 외우고 따라가기에 바빴다. 하늘은 원래 파란 거고, 인생은 원래 힘든 거라고. 그렇게 세상의 신비는 하나둘 빛을 잃어갔다.
호기심의 근육이랄까. 쓰지 않으니 점점 퇴화해 버린 거다. 새로운 영화가 개봉해도 줄거리 요약본부터 찾아보고, 새로운 음악이 나와도 익숙한 옛 노래만 반복한다.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은 달콤하다. 하지만 그게 아주 서서히 우리 세상을 좁히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고, 매일 같은 메뉴로 점심 먹고, 매일 같은 사람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는 삶.
그 안정됨을 빙자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멈춰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새로운 것에 마음을 내어줄 공간을, 스스로 닫아버린 건 아니었을까.
가끔은 용기를 내보려 했다. 새해 다짐으로 외국어 학원에 등록하고, 큰맘 먹고 통기타를 사서 구석에 세워두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첫걸음의 어색함과 서투름을 견디지 못했다.
자전거를 꽤 늦게 배웠다. 다들 쌩쌩 달리는데, 나 혼자 비틀거리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 어찌나 창피했는지. 수십 번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서야 겨우 두 발로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 버리면 , 그렇게 넘어지고 깨지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건가 보다. 실패의 상처보다,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두려운. 그래서 우리는 자꾸 '초보자'가 되기를 망설인다. 이미 잘하는 것, 익숙한 것의 세계에만 머물고 싶어 한다.
'언젠가'라는 이름의 섬이 있다면, 그 섬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일 거다. 그 섬에는 내가 읽으려고 했던 수백 권의 책이 있고, 배우려 했던 악기들이 근사하게 놓여있고, 시작하려 했던 운동 계획들이 완벽하게 짜여 있겠지.
나 역시 그 섬의 오랜 거주민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는 신기루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의 나를 위로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자기 위로이었다.
사실은 두려웠던 거다. 새로운 걸 시작했다가, 재능이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생각보다 재미없어서 실망하게 될까 봐. 이내 포기해 버리는 나약한 자신과 마주하게 될까 봐.
그렇게 '언젠가'의 안갯속에 수많은 '오늘'을 흘려보냈다.
어떤 날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은 빽빽하고,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운다. 숨 가쁘게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바쁨은 그저 멈춰 있는 나를 가리기 위한 요란한 연막이었을지도 모른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부지런히 발을 구르고는 있지만, 결국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있었다.
'소진'과 '성장'은 다르다. 에너지를 썼다는 결과는 같지만, 전자는 공허함을 남기고 후자는 충만함을 남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소진을 성장이라 착각하며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무거워졌다면, 그건 당신의 시간이 다시 흐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 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멈춰버린 시계는 자신이 멈췄다는 사실조차 모르니까.
우리가 느끼는 이 공허함, 이 권태, 이 막막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살아있다는 증거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영혼의 희미한 갈증이다.
그러니 괜찮다. 잠시 멈춰 서서 길을 잃어도 괜찮다. 우리 모두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여행 자니까.
중요한 건, 이 멈춤의 의미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다. 이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조용히 귀 기울여보는 거다.
어쩌면 이 멈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소중한 탐색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더 높이 뛰기 위해, 잠시 무릎을 구부리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멈춤을 응원한다. 그리고 그 멈춤 끝에, 우리가 함께 떠날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