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굉장히 안심되는 일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하나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다른 하나는 마음과 상호작용하는 바깥 세계를 내다보는 일.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사실,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의 건강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역으로 살펴보면, 마음의 건강성을 잃은 사람은, 무슨 특별한 증상이 생기는 걸 넘어,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내기 어렵게 된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오로지 마음에만 집착하기 쉽다. 자신이 상처받고 아픈 존재라는 그 마음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이가 매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면서 쪼그라들고 병든 자기 자신뿐이다. 그이는 점점 쉽사리 고개를 돌려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치자면’ 다른 모든 세상도, 거기 사는 다른 모든 존재들도,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치자면’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나 자신 역시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고 아픈 존재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게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존재에게 살아 있다는 것은 매우 실존적이고 근본적인 이슈다.
물론,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처받은 존재에게, 따귀 맞은 영혼(이런 책 제목이 있다)에게 무척 핵심적인 과제다. 도대체 왜 내가 늪에 빠져 있는지, 도대체 왜 내가 끊임없는 자기부정에 시달리는지 알려면, 그 근원으로 들어가 봐야 하는 것이다. 마음은 분명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게 있다. 마음이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마음이라는 실체가 있는가’, ‘마음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가’. 우리가 마음속에서 발현시키는 갖가지 상들은 사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지각하며,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산출하는 관념 내지 표상 같은 것이다. 또한 나아가 우리가 마음에서 형성하는 갖가지 관념들은 자신이 접촉한 세계를 스스로 ‘해석’한 결과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이를테면 나의 누이는 늘 마음속에 ‘학대받은 딸’이라는 관념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부모라는 외부 세계가 실제 학대를 한 주체임을 확증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이는 자신이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것을, 상처받은 영혼을 안고 살아내느라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극대화하느라 부모라는 외부 세계와 접촉하며 발생한 결핍과 상처를 ‘학대의 서사’로 재해석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에만 집착하며, 외부 세계를 제대로 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거기 실제로 존재하는 타자를 응시하면, 다른 것들이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장자에게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투여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원하는 만큼의 애정도 자원도 나누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누이라는 특정 존재에 대한 학대의 행위가 아니라, 장자를 가계 계승의 중심에 두는 가부장적 사회의 관습(물론 부조리한 관습이다)임을 알게 되고, 우리가 함께한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이가 겪어야만 했던 결핍과 소외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핍과 소외는 학대와 다른 것이다. 또한, 타자를 좀 더 깊이 있게 응시하다 보면, 실은 부모가 내게 절대적인 힘과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처받고 결핍된,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이들이 내가 산출해낸 ‘학대의 서사’ 중심에 있는 악이 아니라, 그저 나를 제대로 양육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물론 외부 세계를 응시하고 직시한다 해서 내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 생에서 분명하게 벌어졌던 사건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외부 세계를 응시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리해야 왜곡된 해석을 바탕으로 현실 세계와 단절된 마음의 진창에 빠지는 일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 우물 속을 너무 많이 들여다본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이라면 우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다들 마음의 우물 하나씩 안고 지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걸 알았다고 해서, 내 어둔 마음이 갑자기 환해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물 안에 있는 것들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난, 어머니를, 아버지를, 형을, 누이를 미워한 적 없다. 물론 외롭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이들은 나보다 더 결핍된 존재라서, 나와 함께 따뜻한 사랑의 춤을 추며, 가끔이라도 삶의 축제를 벌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외로운 채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난 지금도 마음을 들여다본다. 아마 남은 생에서도 나의 뇌가 허락할 때까지 그리할 것이다. 다만, 젊은 날에는 우물 가까이 바짝 붙어 서 있었다면, 나이가 들수록, 우물을 들여다보다가도 좀 멀찍이 떨어져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 물론 산책을 하다가도 우물이 생각나고, 우물을 생각하면 다시 처연한 마음에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거기, 나무가 있고, 흙이 있고, 바람이 불고, 햇살이 내리쬐는 것이 보인다. 간혹 비가 쏟아져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그 또한 괜찮은 일이다. 이는 내가 마음의 진창 안에 갇힌, 혹은 마음의 왕국 안에 사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많은 세계의 일부임을, 다른 많은 존재들 중 하나임을, 그리하여 이 세상에 점처럼 존재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건, 굉장히 안심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