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타자로 연대하지 못한, 고독으로,
내 삶에서 최초의 타자는 누구였을까? 분만실 의사와 간호사였을까? 어머니를 최초의 타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이가 후일 ‘나무’라 불릴 존재를 품은 시기에, 그러니까 완전히 ‘나’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기 힘든 존재가 모체 내에서 변태하던 시기에, 어마어마한 세포분열을 일으키며 형성되고 있던 불완전한 존재를 모체와 완전히 떼어 타자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체의 ‘일부’였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완벽한 공간으로서 자궁에 연결되어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받긴 하지만, 엄연히 모체와 독립적인 개체로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태아는 모체와 한 몸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분리된 타자인 것도 아닌 모호한 존재로 9개월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내가 맞닥뜨린 최초의 타자는 분만실 관계자일 가능성이 크다.
정말 그런가? 타자를 ‘나’와 구분되는 ‘외부 세계’에 있는 존재로 규정한다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갓난아기는 아직 감각이 활성화되지 않아 나와 외부 세계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시각이 활성화되는 수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저기 외부 세계가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아기에게 ‘나’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은 18개월 무렵부터이니, 사실상 나라는 존재가 ‘최초의 타자’를 만나게 되는 건, 그 시기 이후라고 봐야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태아였을 때, 갓 태어났을 때, 타자로 규정하기 어려웠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최초의 타자였을 가능성이 다시 커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직접 아이를 돌보고 키웠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최초의, 막대한 애착 대상이기도 해서, 새로 탄생한 존재가 외부 세계를, 타자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존재는 타자를 맞닥뜨리고,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사건을 확장해 나간다. 난, 살면서, 타자를 대체로 신뢰할 만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최초의 타자로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 설정에서 생긴 문제를 모조리 부모 혹은 어머니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최초의 타자와 신뢰할 만한, 안전한 관계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후 최초의 설정에 고착된 채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규정하는 건, 아무리 세대를 거듭해도 불완전한 영혼의 대물림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초의 타자가 어머니가 아니었거나, 어머니이긴 하지만 불안정하거나 무관심하거나 폭력적인 존재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영유아기의 가장 중요한 애착 대상인 어머니가 부재했다면, 존재했지만 부재하느니만 못했다면,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결코 치유할 수 없는, 망가진 영혼을 끌어안은 채, 이후 어떤 타자와도 신뢰할 만하고 안정된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최초의 타자와 안정된 관계를 맺은 사람보다는 그럴 개연성이 높아질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부여받은 속성에서 한치의 미동도 없이, 조금의 변화 가능성도 없이 성장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변화와 변화 불가능성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타자를 신뢰하지 않게 된 건, 어머니 탓이 아니다.
타자는 세계의 지평을 확장하게 만들어주고, 개체와 개체가 연대해 삶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고 불편한 외부 세계로서 자기 존재의 안전감을 위협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개는 긍정성과 부정성이 혼재돼 경험되지만, 부정성이 더 막대하게 작용할 때 인간은 타자에 대한 신뢰와 세계를 향한 자기 존재의 안전감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나’를 ‘주체’로 둘 때, 저기 외부 세계에 있는 존재를 ‘타자’로 규정할 수 있지만, 외부 세계에 있는 ‘타자’를 ‘주체’로 둘 때, 그 존재에게는 ‘내’가 ‘타자’라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주체’이자 ‘타자’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나 역시 타인에게 ‘타자’라는 것, 이를 자각하지 않으면, 존재란 곧 타자이며,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상의 삶이란 숱한 타자와 타자가 혼재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타자라는 걸 잊는다.
내가 곧 타자일 때, 내가 타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면에는 타자로서 나 역시, 외부 세계에 있는 주체로서 타자에게 신뢰할 만한 타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타자로서 두 주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듯, 존재와 존재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생각과 판단과 감정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 내가 타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발화할 때, 난 내가 신뢰할 만한 타자였는지에 대한 자문 역시 해야 하는 것이다. 난 신뢰할 만한 타자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기만하고 배신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타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그건 타자가 나를 기만하고 배신했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기 존재를 타자와 타자의 연대로 선 존재로 인식하기보다, 홀로 선 단독자로 인식하고자 했으며, 단독자로서 타자와 타자는 궁극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고독한 존재라고 느꼈다. 내가 타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타자로서 자기 존재도 신뢰하지 않았다. 이렇듯, 홀로 선 타자로서 나를, 나조차도 신뢰하지 않는 나를, 외부 세계에 있는 주체로서 타자가 신뢰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단절된 채 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의 타자였을 개연성이 높은 어머니와 조우한 후, 난 생에서 숱한 타자들을 만나왔지만, 그때마다 주체로서 타자들을 만나며 연대하려 하기보다, 숱한 타자들의 공존을 낯설어하며, 타자로서 나를 낯설어하며, 홀로 살아가려 했다. 새 가족을 꾸리고도, 그 영혼의 뿌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세계의 지평을 확장하지 못한 건, 타자와 타자의 연대로 삶의 지평을 확장하지 못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자꾸만 존재의 심연과 연결되려 했으며, 무작정 우주와 만나고 싶어 했다. 애초에 나는, 내가, 우주의 낯선 존재로 존재하다가 무화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무치게 고독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존재나, 나를, 타자를, 세계를 이렇게 인식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홀로 있을 때 기화되어버리는 물 분자가 서로 연대하여 물방울을 이루듯, 타자와 타자가 연대해 존재를, 삶을 구체화하고, 그 물방울로 더 많은 일들을 해내며 살아갈 수도 있다. 또한 단 하나의 물방울로 살아가기보다 물방울과 물방울이 연대해 더 큰 물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며, 세계의 지평을, 존재의 지평을 확장해 나갈 수도 있다. 시냇물로 살든, 호수로 살든, 강으로 살든, 바다로 살든, 대개는 그렇게 타자와 타자의 연대로 존재를 꾸려 나간다.
나로 말하자면, 홀로 선 단독자라 하면서도, 결국 완전히 단절되지는 못한 채, 곧 기화될 물 분자 하나와, 몇몇 물 분자들로 약하게 연결된 물방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존재해왔던 것 같다. 최초의 타자인 어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또 다른 타자들과, 약하게 연결된, 작은 물방울로부터 존재로서 삶을 시작한 나는, 내내 기화되기를, 무화되기를 바라면서도, 어쨌든 물방울로 남아 존재하면서, 언제쯤 존재의 심연에서 우주로 곧장 솟아오르는, 단 하나의 원자로 해체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 어머니,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품어, 나의 최초의 타자가 되어, 나를 이 세상에 낯선 타자로 버려두었나요? 어찌하여 이렇게 간절히 기화되기를, 무화되기를 바라는, 사무치게 고독한 분자로 남겨두었나요? 아, 나는, 어디서 다시, 내가 열망하던, 물방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어리석은 생각. 타자인 나는 어떤 타자와도 맞닿은 적 없으니, 나는 단 한 번도, 영롱한 물방울이었던 적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