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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Feb 01. 2023

언제든 절멸하겠지만, 그래도 봄

다시 입춘, 혹은 다시 오지 않을 입춘에

다시 입춘이다. 절기는, 연말이나 새해와 사뭇 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절기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보면, 그건 생명을 길러내기에 적합한, 아주 특별한 조건을 지닌 이 행성이 약간 기울어진 채 자전하며 태양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공전하는 일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다시 입춘이 왔다는 건,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절기에 걸맞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건, 아직 이 행성과 뜨거운 항성 사이의 관계가, 그 관계로 인해 빚어지는 생명의 순환이 그럭저럭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일 게다.


물론 ‘다시’ 입춘을 맞이하는 일이, 그 입춘이 우리가 아는 절기로 다가오는 일이 영원히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실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종을 절멸시키는 방식으로, 생명의 순환 조건을 막대하게 훼손시키는 방식으로 번성해 온 우리 종이 되돌릴 길 없는 치명적인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큰일은 아니다. 수십억 년 동안 이 행성에서 명멸해 간 종들은 숱하게 많고, 우리의 운명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부인할 필요는 없다. 사피엔스는 특별한 종이 아니다. 다만,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번성했고,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인해 멸종할 것이다. 이 행성은 우리 종의 절멸에 개의치 않고, 남은 수십억 년 수명 동안 또 다른 종을 길러낼 것이다. 수십억 년 뒤에는 뜨거운 항성의 사멸과 함께 이 행성도, 이 행성의 모든 종들도 우주의 먼지로, 원자로 돌아갈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거기에 있다.


물론 사피엔스를 제외한 모든 종들은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종의 절멸이나 행성의 기후 변화, 적색거성을 거쳐 백색왜성이 되어갈 항성의 운명 따위와는 상관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종의 재생산과 번성을 위해 분투할 것이다. ‘사피엔스를 제외한 모든 종들은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고? 그런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고,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명제다. 우리 종은 수십 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척’해왔다. 걱정하는 ‘시늉’만 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풍경은, 사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 행성이 지닌 특별한 생명 순환 조건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 번성해 왔다. 다른 그 어떤 종도 그러한 방식으로 번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생명 종들은 순환의 체계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인간 종이 순환의 체계 안에 안주하지 ‘못한’ 까닭은, 그것으로는 종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한없이 약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명 순환 시스템의 일부가 아닌, 이 행성의 주인이 되기로 했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를 ‘발전’과 ‘성장’이라 말했다. 이는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다. 그 어떤 존재도 끊임없이 성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단 이 행성의 생명체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이 거대한 생명 순환 시스템에 관여하는 저 뜨거운 항성도 언젠가는 마침내 사멸할 것이다. 그렇게 사멸한 존재들은, 원자가 되어, 이 우주 안에서 또 다른 존재를 잉태할 것이다. 존재의, 에너지의 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이 우주 안에 ‘없다’.


끊임없는 발전과 성장을 이야기하며, 그것으로 존재의 생존을 추동해 온 인간 종이 당면한 ‘진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척, 걱정하는 ‘시늉’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비교적 명백하다. 거스를 수 없는 치명적인 변화를 막기 위한 조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때, 인간 종은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순환의 체계 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생존을 담보해 준 것은 순환의 체계로부터 벗어난, 파괴적인 방식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단한 성장이라는 ‘헛된’ 신화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생존을 추동해 온 것은 바로 그 헛된 신화였다.


나는 SF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렇기에 <인터스텔라>도 아주 즐겁게 관람했지만, 이 영화의 문제적 대사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우리가 늘 그랬듯이”는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발전과 성장의 서사에 기댄 이 영화는 심지어 ‘미래의 우리’가 우리를 도와 인간 종을 구원하리라는 놀라우리만치 ‘불길한’ 자기 확신을 보여준다. 우리의 신화는 헛된 것이 아니며, 이 행성이 망해도 우주의 다른 영역에서 신화는 계속되리라는 자기 확신…. 불길하다. 실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이기 때문이다. 그 자기 합리화가, 결국은, 인간으로 하여금 걱정하는 시늉만 하다가, 절멸의 길을 걷도록 만들 것이다.


입춘에, 생명의 순환이 계속되리라고 예고하는 절기에, 마침내 절멸할 종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이하고 불편한 일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죽음이 운명 지어져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기어이 살아내는 것이 생명체들의 일이듯, 절멸할 운명임에도 지금 이 순간 부단히 존재해 나가는 것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일이다. 게다가, 절멸이란 실상 우리가 경험하며 인식하고 있는 존재의 형태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우리는 우주의 먼지가 되어, 원자가 되어 거대한 존재의 순환 고리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우리가 늘 그랬듯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존재해 나갈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그렇듯이.” 문득 상상해 본다. 사멸한 나의 원자를 흡수한 나무를, 사멸한 나무의 원자가 순환하는 이 행성을, 사멸한 이 행성의 원자를 품어 안은 우주를, 사멸한 우주가 다시 빅뱅으로 존재를 산출하는 순간을….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가. 그럴 것이다. 입춘에,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시절에 우리가 꿈꾸는 건, 치열하게 살아내는 작은 존재들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대지의 기운을 한껏 빨아들이는 뿌리를,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가지를, 힘껏 어여쁜 얼굴을 내밀려하는 꽃망울을, 비로소 다시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푸르른 잎사귀를, 우리는 꿈꾸기 때문이다. 잎사귀 위로 봄을 노래하는 새들이 날아들 것이고, 어느 토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짐승들이 새싹의 촉촉한 냄새를 따라 나와 산과 들을 거닐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그런 봄을, 그런 삶을 꿈꾼다. 살아 숨 쉬는, 약동하는 삶. 그러니, 절멸할 운명과, 우주의 일원으로 순환할 숙명이, 위로로 다가올 리 없다. 그래도, 안심은 되지 않는가. 나라는 존재에, 당신이라는 존재에 그다지 커다란 의미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러니, 이 형언할 수 없는 무의미 속에서, 나도, 당신도, 그냥 그렇게 꿈꾸며 살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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