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뒤에 오는 슬픔을 사랑했을 뿐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두루 통해 있는 聖人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聖人의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對待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怒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지껏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던 슬픔은 한 장의 덮개 그림처럼 떨어져내렸다. 壁도, 덮개 그림도 허깨비일 뿐이며, 그것들이 비록 양파 껍질처럼 거죽이면서 동시에 속이 된다 할지라도 허깨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허깨비가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
_ 이성복, 《그 여름의 끝》 표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