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올 그 순간을, 외면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점심으로 떡국을 끓여 식탁에 앉은 뒤, 무심히 전원을 켠 TV의 영화 채널에서 방영 중인 <8월의 크리스마스> 후반부를 보다가,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는 거다. 물론 이 영화는 늘, 볼 때마다, 울게 만든다. 병원에서 돌아온 정원은, 마지막을 준비하며, 다림에게 편지를 쓰지만, 결국 부치지 못한다. 아니, 부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그이의 마음에 더 가까운 이야기일 게다. 그이는 이제 그저 추억이 되어버린, 하지만 곧 추억조차 하지 못하게 될, 지난날의 사진들을 들춰보고,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영정 사진을 찍는다. 정원이 사진관을 운영한다는 건 꽤나 상징적이다. 삶의 장면들을 남기는 곳, 거기서 타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인화하던 정원은 이내 스스로 누군가의 삶의 한 장면으로 남은 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다시 삶의 장면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정원의 아버지가, 정원이 남겨둔 매뉴얼을 익혀 사진관을 계속 꾸려 나가는 것처럼.
삶의 끝을 응시하다 보면, 곧 필름을 되감듯 지난 삶을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의 끝에서 애초 삶이 시작된 장면까지 다다르게 된다. 삶의 마지막 장면들 속에서 아기처럼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삶의 시작점에서 정말 아기였을 아버지를 생각해보곤 한다. 어느 사진첩에서도 아버지의 유년기나, 영아기 때 사진을 본 적 없다. 누구나 사진첩에 삶의 장면들을 남길 수 있는 시대에 살지 않은 탓이다. 그게 아쉬웠던 것인지, 나와 나의 형제들이 유년기일 때, 아버지는 우리들의 사진을 적지 않게 찍었더랬다. 그 기록 속에 남아 있는 나의 최초의 장면은, 어느 집 마당, 벽돌색 고무 대야 안에 발가벗은 채 앉아 있는 아기다. 나는 가만히, 웃는 듯, 우는 듯, 한 손을 든 채 앉아 있는 그 아기의 얼굴에서, 가끔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삶의 시작점이 있었다는 것, 그이들에게도 아기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 거기서 그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
바닷가 호텔 옆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니 얻게 된 특권 하나는, 자주,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기를 만날 수 있다는 거다. 서울에서도 이렇게 자주 아기들을 접한 적 없었다.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 오래전 아기였다가, 성인이 되어, 이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사람들. 이제 막 자신들과 함께 먼 곳까지 여행 올 수 있게 된 아기를 안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지금 이 순간과 다가올 시간을 즐거이 그려보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삶의 장면들이, 어떻게 직조되어 나갈지, 먼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이 이야기의 시작은, 먼 길을 떠나는 여행처럼, 낯설지만 설레는 모험으로 열리고 있는 것 아닐까. 부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물론,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아름답게 열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삶은 음습하고 우울하게, 때론 처연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가, 기쁨과 축복과 환희로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지리멸렬한 통속극의 한 장면처럼 그저 그렇게 시작되었는지, 난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이들의 젊은 날은 그리 밝지 않았고, 미루어 짐작컨대, 장면을 되돌려, 그 너머의 유년기와 영아기로 넘어간다 한들, 그 처연한 젊은이들의 삶의 이야기가 밝은 장면으로 시작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추측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이들이, 바닷가 호텔 옆 편의점을 찾은 젊은 부부들처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을 때, 그 순간 역시, 기쁨과 축복과 환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 그이들은, 그 사건이, 그 사건으로 인해 이어질 삶이 부디 행복하기를 꿈꾸었다. 희망, 같은 것이었다. 삶이란, 대개, 그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면서부터 죽을 운명에 처해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으려 하고, 삶에 천착한다. 그게 생명의 속성이다. 부활과 환생의 신화도, 어찌 보면, 삶의 영속을 바라는,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우주의 일원이 되는, 완전한 무화를, 완전한 부재를, 완전한 무의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하여, 굳이 부활과 환생의 신화에 기대지 않는다 해도, 많은 존재가 재생산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통해 삶의 영속을 꿈꾼다. 운명과 우연이 직조한 삶이 그렇게 계속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선대에서 그이들에게로, 그이들에게서 나와 나의 형제들에게로, 나와 나의 형제들에게서 그 자녀들에게로, 삶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과 애착이 이어지는 것이다.
인간과 같은 희망을 갖지는 않지만, 다른 살아 있는 것들도, 삶에 대한 본능적 애착을 품는다. 날두가 인간과 같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녀석은 너무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당신들,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삶을 함께했던 살아 있는 존재들을 애타게 찾았을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 있고 싶어 하고, 삶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묻지 않았지만, 듣지 못했지만, 아기처럼 누워 있는 아버지도, 살아 있고 싶을 것이다. 아기처럼 누워 있던 어머니의 죽음의 순간을, 무화의 시간을, 어떻게든 연장시키며, 살아 있게 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정원은 죽음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알면서도, 삶의 장면들을 촬영하고 인화하며, 살아 있는 존재로서 여전히 삶을 살아 나간다. 또한 마지막 순간이 목전에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삶을 사랑하며, 살아 있는 타자를 사랑한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이는 죽음의 순간을, 무화의 시간을, 영원한 부재의 시간을, 처연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힘껏 살아 있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 있는 것,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것들아,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하지만 끝내 올 그 순간을, 외면하지 말라. 누구든 무화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