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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May 23. 2023

아마도 나는, 허깨비를 사랑했을 뿐

슬픔 뒤에 오는 슬픔을 사랑했을 뿐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두루 통해 있는 聖人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聖人의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對待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怒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지껏 넘을 수 없는 壁으로 생각되었던 슬픔은 한 장의 덮개 그림처럼 떨어져내렸다. 壁도, 덮개 그림도 허깨비일 뿐이며, 그것들이 비록 양파 껍질처럼 거죽이면서 동시에 속이 된다 할지라도 허깨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허깨비가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
_ 이성복, 《그 여름의 끝》 표지글




편의점에서 만난 고양이는 무척 작은 녀석이라, 난 녀석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인 줄 알았다. 내 착각이었다. 어느 날부터 그 작은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배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녀석은 작은 젖꼭지를 하나둘 맺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열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유리문 너머에 가까이 앉아 밥을 달라고 보채는 녀석은 공교롭게도 날두를 화장터로 보내던 날, 배가 홀쭉해져 나타났다. 저기 어디서 새로운 생명을 출산한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 죽었고, 누군가 태어났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누군가 세상에 인사를 건넬 것이다.


상실과 환대 사이에서, 존재의 입구와 출구, 비존재의 출구와 입구 사이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선 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깨비 같은 삶을 살아내느라 분투한다. 그것이 허깨비인 줄도 모르고, 무겁게 내려앉은 삶의 슬픔을 감당해내느라 휘청거린다. 때로는 슬픔을 상쇄할 기쁨을, 환희를 애타게 찾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찾던 기쁨 끝에 기다리는 것이 결국 슬픔이라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가 예비하는 것은 결국 삶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걸, 존재하는 일의 의미를 구하는 길 끝에 기다리는 건 결국 무의미로 돌아가는 비존재와 무화라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한다.


《그 여름의 끝》을 구입하던 해에 나는 겨우 스물넷이었고, 두어 해가 지나면 그로부터 30년을 건너게 될 게다. 스물넷의 나는, 그 여름의 끝에 서서, “새들은 무리 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아주 흐린 날의 기억)는 시구에 밑줄을 그어두었다. 지인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던 날, 책장 한구석에서 숨 죽인 채 잠들어 있던 시집을 꺼내 들었다. 그이를 알게 되던 , 난 아직 30대 중반의 젊은 편집자였고, 그이는 이제 막 마흔을 넘긴 북디자이너였다. 우리는 이성복을 사이에 두고 금세 가까워졌다. 처음 만나던 날, 책이나 표지 이야기 따위는 집어치운 채, 이성복의 시와 그이의 시를 읽던 어린 날을 추억하며 소주 몇 병을 비웠더랬다. 그날 만난 그이는, 말 그대로, 관 뚜껑을 미는 심정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이가 서글프게 좋았다.


오랜 업을 뒤로한 채, 나의 고향 도시를 남겨둔 채, 이곳으로 강제 이주할 적에,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준 것도 그이였다. 그 뒤로도, 때때로 취기에 기대 다정한 안부 전화를 걸어준 이도, 때때로 아름다운 노래를 보내준 이도 그이였다. 술을 마시다, 죽도록 술을 마시다 죽어버린 형을 기억하며, 제발 술 좀 줄이라고, 밥 좀 잘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할 적에, 그이는 그저 큰소리로 웃으며 외치듯 말하곤 했다. “야, 인마, 결국 죽게 돼 있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하지만, 그이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관 뚜껑을 미는 심정으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이가 내게 말한다. “걱정하지 마. 곧 연락할게.”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슬플 뿐이다. 이 생이 온통 허깨비일 뿐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난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다. 슬픔 뒤에 오는 슬픔을, 난, 아직도, 떨쳐내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소주병을 비우며 이성복을, 이성복의 시를, 이성복의 시를 읽던 젊은 날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한때, 습작을 했던 그이가, 곱고 아름다운 필체로 적은 자신의 글을, 젊은 날의 이야기를, 낡고 빛바랜 종이에 써 내려간 마음을, 취기를 빌려 보여주었던 날이 기억난다. 이제 우리는, 그날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허깨비가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 당신도 나도, 당신과 나 사이에 놓였던 소주병도, 당신과 나 사이에 흘렀던 시들도, 모두 허깨비였을 뿐. 우린, 허깨비를 사랑했을 뿐. 아마도 나는, 허깨비인 당신을 사랑했을 뿐.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_ 이성복, <그 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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