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Nov 02. 2022

태어나, 살았고, 곧 죽을 예정

달에게, 명왕성에게, 헐거운 삶에게

삶이 너무 헐거워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을 때에는, 별것 없는 이 가벼운 삶 대신, 누가 더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만약 염치없게도 나의 삶을 쓴다면, 누구는 자서전이라 부르는 무엇을 쓴다면, 아마도 단 한 문장이면 될 거라 생각했다. 태어나, 살았고, 곧 죽을 예정. 


늦가을 거리를 걷다가, 보도블록을 내려다본다. 블록 사이에 빼꼼히 얼굴을 내민 풀들은, 그래도 여름 내내 어떻게든 고개를 치켜들려 애쓰곤 했다. 부질없는 짓이긴 했다. 누군가는 발로 짓이겼고, 누군가는 가차없이 뽑아냈으니, 사실 그들의 삶이란 깨끗하게 보존되어야 할 보도블록보다도 못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곧 바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 그들은 숨죽인 채 다음 봄을 기다리려나. 그러지 마. 올라오지 마. 다시 오는 여름에도 너희들은 애써 내민 얼굴이 짓이겨지고, 구태여 자리 잡은 몸통은 뿌리째 뽑히고 말 거야. 너희들에게 묻고 싶어. 유서를 쓰고 싶어? 무어라 말하고 싶어? 


살면서, 유서를 생각해본 적 있다. 그러다 문득 묻는다. 누구에게? 누구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은 거야? 너를 짓이긴 발에게? 너를 뿌리 뽑은 손에게? 실은 바람결에 날아가 뿌리내린 식물에게 말하고 싶었다. 난 네가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무가 되는 걸 보고 죽으면 좋겠다. 태어나, 살다가, 곧 죽을 예정인 나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 더 오래 살아보기로 한다. 아비도 내가 태우고 싶다. 아비와 어미와 장자의 가루를 한데 모아 흙에 뿌려주고 싶다. 그 흙에서 나무가 자랐으면 좋겠다.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나중에 죽을게.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먼저 죽는 게 미안해서였다. 그러다 생각한다. 아이가, 아비 없이 어미를 태우는 게 나을까, 어미 없이 아비를 태우는 게 나을까. 어미를 먼저 태운 나는, 어미보다 장자를 먼저 태운 나는, 어미와 장자 없이 아비를 태울 나는, 잘 모르겠다. 아이에게 물을까. 어미와 아비 중 마지막으로 태우고 싶은 것이 누구냐고. 누구를 마지막으로 네 흙에 뿌리겠느냐고.


유서를 쓰는 대신, 아비의 손을 잡고 쓰다듬어 준다. 어미의 손을 잡아보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그이의 납작한 발바닥만 사무치게 주물렀다. 눈을 감고 잡아도 어미의 발인 줄 알겠다. 허나 어미의 손바닥이, 어미의 손바닥의 감각이 생각나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대신, 어미의 손을 잡았을 아비의 손을 잡고 쓰다듬어 준다. 언젠가 내가 태울 아비의 손바닥은 아직 따뜻해서 서럽더라.


달에게 물었다. 창백하게, 반쪽이 되어선,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달에게 물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야.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지난달, 내가 달을 불렀을 때, 달은 눈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이곳으로 올래? 이곳으로 와서 달흙이 되겠니? 넌 늘 원했잖아. 유서를 쓰고 싶다 했잖아. 유서를 쓰고 우주의 먼지가 되고 싶다 했잖아. 이곳으로 와서 달흙이 되지 않을래? 


하지만 난 달에게 되물었다. 명왕성에 갈 수 있을까? 네가 날 그곳으로 날려줄 수 있을까? 그곳으로 가고 싶어. 태양계의 끝에서, 보이저의 심정이 되고 싶어. 별빛이 된 지구를 눈에 담고 우주로 날아가고 싶어. 명계를 닮은 명왕성에서, 하데스의 별에서, 난 깃털처럼 가벼워져선, 우주로 날아갈 수 있어. 달흙이 되고 싶지 않아. 달흙이 되어 지구를 바라보고 싶지 않아. 거기선 너무 아름다워 보일 거야.


창백하게, 반쪽이 된 달이,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하지만, 넌 지금, 명계로 갈 수 없어. 서러운 네 아비의 손바닥을 태워야 하잖아. 네 아이에게 묻지도 못했잖아. 답을 듣지도 못했잖아. 네 유서는 내가 갖고 있을게. 태어나, 살다가, 죽었고, 달흙이 되어, 지구에서, 나무가 자라는 걸, 밤마다, 바라보노라. 여기서 나와 함께 지구를 바라보자. 여기서 나와 함께, 밤마다, 보도블록 사이에 구태여 얼굴 내미는 풀들과, 염치없이 가벼운 삶과, 바람결에 날아가 뿌리내린 식물과, 어미와 아비를 태운 아이와, 너처럼 명왕성에 가고 싶어 하는 영혼을 지켜보자.


늦가을, 거리를 걷다가, 보도블록을 내려다본다. 거기 작은 틈 사이에, 헐거운 삶이 보인다. 태어나, 살았고, 곧 죽을 예정. 명왕성이 거기 있었다.

이전 01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안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