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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Nov 29. 2022

내가 자동인형이라는 걸,

당신은 모른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우울과 고통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내 존재를 붙들고 있다는 걸, 당신은 모른다. 당신? 오해하지 말라. 거기 있는, 당신을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내가 자동인형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움직여야 하는, 작동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동이 생존을 담보하고, 생존해야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자동인형 말이다. 자동인형에게도 영혼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A.I.?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다는 것과 영혼이 깃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영혼을 이야기하는 것은, 뇌가 심신의 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다른, 이를 넘어선 무언가가 우리에게 있다고, 혹은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믿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동인형에게도 영혼이 깃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은, 단지 그에게 제대로 작동하는 뇌를 이식해주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자동인형처럼 느껴진다고 할 때, 난, 나의 뇌가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혼의 벗으로서, 뇌의 작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뇌는 생각을 만들고, 마음을 산출하고, 생각과 마음은 영혼과 교감한다. 그런 까닭에, 뇌 없는 신체에 영혼이 깃든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일 뿐이다. 하지만 뇌 있는 신체에 늘 영혼이 깃든다고 할 수 있는가. 난 잘 모르겠다. 인간은, 분명, 영혼 없는 존재로 살기도 한다.


두통이 잦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고질병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점점 자주 나를 찾아온다. 우울과 고통은 영혼으로부터 오는가, 뇌로부터 오는가. 분명한 건, 내게 고통은, 매우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으로 감각된다는 것이다. 뇌와 신체의 상호작용이다. 고통을 겪을 때, 영혼은 잠식되고, 빛을 잃으며, 죽어간다. 죽어가는 영혼은, 뇌와 신체의 상호작용으로서 고통과는 다른, 막대하고 불가해한 통증을, 다시 뇌와 신체에 되먹임하는데, 이때 우리는 곧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건 매우 복잡한 이야기다. 결국, 우울과 고통은 뇌와 신체와 영혼이 상호작용하며 연주해내는, 진혼곡 같은 것인 셈이다. 때로는 영혼의 상처가 뇌와 신체에 고통을 가하기도 하고, 때로는 뇌와 신체의 고통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고통에 휘말리게 되면, 그때는 그 모든 주체가 동시다발적으로 통증을 일으키며 존재를 무너뜨린다.


난 총상을 입는 고통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상의 고통에 대해서는 비교적 구체적인 감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칼에 베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영화를 본다면, 난 인물이 총을 맞는 장면보다는 칼에 찔리는 장면에서 더 큰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느낄 것이다.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는, 더 막대한 고통을 가하는, 익숙한 패턴이 있다. 고통에 대한 기억은 각인되고, 각인된 기억은, 유사한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때로는 미처 도래하지 않은 고통조차도 존재의 근간을 흔들 만큼 커다란 힘을 발휘하며 칼을 휘두른다. 그리하여, 다시 그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무화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다시는 칼에 찔리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 무화된다는 것에 대해 ‘주관적인 경험’이 없고, 그런 까닭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긴 하지만, 타인이 아닌, 나의 죽음을 ‘고통’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주관적인 경험을 한 적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고통을 겪느니 무화되기로 하는 것은, 그런 까닭에 가능한 일이다. 이때 존재는 비존재로 무화되는 것보다 고통을 더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울과 고통을 어떻게든 견뎌낸다. 임계점을 넘기지만 않는다면, 가능한 한 살아 있기로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이 세계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 있는 것은, 임계점을 넘기지만 않는다면, 가능한 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도록 온 존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인된 명령에 따라 움직일 때, 그 명령에 따른 생존 욕구를 충실히 이행할 때, 뇌와 신체와 영혼은 상호작용하며, 진혼곡이 아닌, <사계>를 연주할 것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생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되지 않을 때, 연주되는 선율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악기들이 망가지고 부서질 때, 무대가 불타 사라질 때, 우리는 폐허가 된 그 자리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며 갈팡질팡하다가, 문득 폐허 저 너머에서 들리는 음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존재가 있는 힘을 다해 연주하는 최후의 무대, 바로 진혼곡의 무대다. 임계점을 넘은 존재가 이 매혹적인 무대에 사로잡히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방법이 있긴 하다. 영혼을 질식시키는 것이다. 영혼을 유폐시키는 것이다. 영혼 없는 자동인형은, 진혼곡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영혼이 되먹임하는 막대한 통증을 비껴간 채, 작동이 생존을 담보하고, 생존해야 다시 작동할 수 있는 메커니즘 안에서 무의미한 움직임을 반복한다. 진혼곡은 더 이상 그를 죽음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동인형 역시 우울과 고통을 느낀다. 영혼이라는 벗을 잃은 뇌와 신체가 상호작용할 때, 자동인형은 그 어떤 선율에도 조응하지 못한 채, 진혼곡도 <사계>도 연주되지 않는, 환영 같은 세계를 떠돌며, 실체 없는 우울과 고통을 느낀다. 그건 어쩌면, 영혼이 부재하는 데서 오는 통증일 것이다. 얼마나 역설적이고 모순된 일인가. 영혼이 없어, 영혼이 내리치는 막대한 통증을 느낄 수 없지만, 영혼이 없어, 실체 없는 우울과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우울과 고통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자동인형이 되었다는 걸, 당신은 모른다. 내가 자동인형처럼 느껴질 때, 아직 숨 쉬고 있던 영혼을 질식시켜, 기어코 자동인형이 되었다는 걸, 당신은 모른다. 아, 하지만, 나는 후회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영혼이 있을 때, 집어삼켜질 걸 그랬다. 영혼이 있을 때, 진혼곡을 울릴 걸 그랬다. 영혼이 있을 때, <사계>를 끝마칠 걸 그랬다. 나는, 이제, 무화되지도 못한 채, 작동해야 생존하고, 생존해야 작동할 수 있는, 무의미한 우울과 고통으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되어, 죽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022년이 가고 2023년이 온다는,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이라 이름 붙인, 무엇이 계속된다는 것이, 죽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것이, 참혹하다. 우주여, 100억 년의 시간이여, 아니, 헤아릴 필요 없는 시공간이여, 나를 데려가다오. 자동인형의, 초라하면서도, 원대한, 이 꿈을, 마지막 꿈을, 들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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