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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Aug 01. 2023

욕망에게, 혹은 욕망의 잔해에게

성기 끝에서 와 칼 끝으로 가는 나에게

아이에게 막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하던 때에 인터넷 서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초창기 인터넷 서점에서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이벤트를 벌였는데, 매달 우수 독자 서평을 선정해 해당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당시 난 이제는 사라진 동교동 기찻길 옆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고, 편집자로서 처음으로 책 하나를 만들어내는 전 과정을 책임지고 진행하는 중이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이었다. 첫 책임편집 도서 출간에 대한 기쁨 때문이었는지, 인터넷 서점에서 제공하는 상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는지, 해당 도서에 대한 독자 서평을 작성해 올렸던 기억이 난다. 그 달의 독자서평에 선정되었고, 3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도서 구입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서 구입비는 물론, 아이를 위한 그림책을 사는 데에 모두 사용해 버렸다. 책 편집자가 자신이 만진 책의 독자 서평을 올리는 꼴이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난 분명 그 책의 첫 독자였다.


당시 난 ‘욕망이라는 악마’에 대해 썼다. ‘욕망’을 간단히 ‘악마’라 단정 지어도 되는 것인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욕망이 숱한 악을 낳은 것만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 속 수많은 사건들이 이를 입증해 준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다룬 욕망, 그리고 악은, 주로 성적 욕망에 대한 것이고, 소설의 주제에 따라, 나 역시 성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어린 날과 젊은 날의 소회를 서평의 줄기로 삼았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면,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 아무 데도 없는 애인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아마도 난 아직 오지도 않은 그이를  만나 고결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게다. 몸에 변화가 오던, 사춘기 어느 여름날 이후로, 난 언제나 뜨겁고 맹렬한 무엇을 몽상하곤 했다.


낡은 선풍기를 틀고 마루 바닥에 눕는다. 열어둔 창문으로 한여름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간간이 불어 들어오는 더운 바람. 이건 어디서 많이 본 풍경. 40여 년 전, 춘천살이의 마지막을 보내던 집에서 ‘난닝구’ 차림으로 낡은 선풍기를 튼 채 방바닥에 누워 있던 내가 떠오른다. 맹렬하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싣고 들어와 내 몸을 훑고 지나가던 더운 바람. 아무도 없는, 쥐 죽은 듯 조용한 빈 집에 홀로 누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여름날을 몽상으로 채우던 나는, 비릿하고 끈적끈적한 첫 자위와, 자위 뒤에 오는 헛헛함을 닦아내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욕망했고, 욕망이 소위 인간의 문명화에 기여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채울 수’ 있을까. 어린 나는 비릿하고 끈적끈적한 자위로,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간단히 ‘채울 수’ 있었을까. 아니, 난 그날 이후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무 데도 없는 애인을 그리워하며, 더 큰 욕망을 갈구하고 있었다. 욕망이란 그런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것. 욕망이 더 큰 욕망을 낳는 것. 너무 나아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인류가 절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성기 끝에서 와 칼 끝으로 가는 제 운명의 향배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제는 하루 종일 쓰레기를 치웠다. 실은 그제도, 그끄제도. 여름날의 해변을 찾은 욕망들이 남긴 잔해. 플라스틱과 빈병과 음식물쓰레기들. 성수기를 맞아 수직 상승하는 편의점 매출로 흥에 겨운 주인장들의 웃음을 뒤로하고,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와 함께한 나의 하루가 트럭 적재함에 가득 실렸다. 면사무소에 마련된, 쓰레기 분리 수거장에 하루를 내려놓는다. 내 욕망의 잔해도, 내 삶의 잔해도, 버얼건 국물 자국이 묻은 플라스틱 용기와 함께 내려놓는다. 내일도 섭씨 30도를 웃도는 더위와 함께 여름날의 욕망이 해변을 가득 채울 것이고, 나 역시 비루먹은 삶을 부지하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동을 팔아 욕망을 사기 위해 바닷가 편의점에 출근할 것이다. 허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저, 시든 성기로도 사랑을 갈구하듯, 제 구실을 못하는 잇몸으로도 허기를 참지 못하듯, 생의 욕망에 휘둘리며 또 하루를 살아내겠지.


더운 바람이 매미 소리를 싣고 들어오던 그 여름날, 실은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자위로 성기 끝의 욕망을 갈구하기보다, ‘화’를 만나고 싶었다. 그 여름, 방학이 되기 전, 버스 차창 밖으로 걸어가던 그이가 생각난다. 그이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버스 차창을 열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볼 걸 그랬다, 당장 버스에서 내려, 이름 불러 인사를 건넬 걸, 악수를 청할 걸 그랬다, 고 생각하다가, 아, 욕망이구나. 채울 수 없는 욕망. 소리 내어 이름 불러보고자 하는 욕망, 마음을 발화하고자 하는 욕망, 손 내밀어 그이를 잡아보고자 하는 욕망, 체온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 어리석게도, 나는, 욕망하는 내가 더 욕망하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구나. 어리석게도, 나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채우려 해보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구나.


여름날의 해변을 찾은 욕망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당신의 욕망은 안녕하신가요? 뜨겁게 욕망하다가, 부디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세요. 욕망의 잔해는 제가 잘 갈무리해 드리겠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거기에는, 제 욕망도, 제 욕망의 잔해도 섞여 있으니까요. 저도 당신만큼 보잘것없는 존재이니까요. 내일도, 어떻게든 욕망해 보겠습니다. 살아내 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어서, 무화되고 싶어지는군요. 욕망하지 않는,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고 싶어지는군요. 우주의 먼지가 되면, 우주의 먼지가 된 ‘화’를 만나면, 그이의 이름을 부를 필요도, 손 내밀어 그이를 잡아볼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를. 욕망하지 않는 존재들로만 이루어진 ‘코스모스’. 완벽한 질서이자 무질서. 무해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텅 빈 세계.




꽃이 잎과 줄기와 향기로

꽃밭을 몸 안으로 잡아당기듯

꽃이 꽃밭의 육체를 잡아당겨

젖가슴을 내놓고 가랑이를 벌리듯

꽃밭의 꽃이라는 꽃은 모두 손에

잡히는 세계를 몸 속으로

몸 속으로 밀어넣듯


욕망의 성기며 육체의

현실인 말은

오늘도


_ <말>,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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