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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Nov 30. 2022

부재감,

아무 데도 살지 않는 애인을 그리워하는,

‘없다’는 것과 ‘있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완전히 다른 일이다. ‘무(無)’와 ‘부재(不在)’는 다르다. 부재는 결핍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 데도 없는 애인’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말한 건, 결핍과 부재감에 대한 것이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부재감은 존재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근원적인 공허감이자 결핍감이다. 내게 당신이 있지 않다는 것, 내게 사랑이 있지 않다는 것, 내게 삶의 이유가 있지 않다는 것, 이는 아직 무화되지 않은 존재가 존재답게 존재하는 데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질병이다.


‘완전한 무’가 아닌 ‘있지 않음’으로서 ‘없음’을 극복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자기복제를 할 수 없는, 불멸성을 획득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사랑’이라 이름 붙인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숙명 같은 과제다. 우리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부재감의 허기에 시달린다. ‘있지 않음’으로서 ‘없음’, ‘부재’가 자기 존재를 위협할 때, 부재감이 가져다주는 공허함, 어둠에 휩싸인 우주 공간에 버려진 것 같은 막막함에 사로잡힐 때, ‘존재’와 ‘부재’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비존재가 되기로, 무화되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는, 단번에 불일치를 해소하기보다, 부재를 존재의 영역으로 끌고 나와, 생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시인은 성탄절 날 ‘아무 데도 살지 않는 애인’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성탄절 날 나는 하루 종일 코만 풀었다 아무 愛人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나 電話했다 집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살지 않으니 죽음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빨간 제라늄처럼 흔들리다가…… 나는 아무 데도 살지 않는 愛人이 보고 싶었다 그 여자의 눈 묻은 구두가 보고 싶었다 성탄절 날 나는 낮잠을 두 번 잤다 한 번은 그 여자의 옷을 벗겼다 싫어요 안 돼요 한 번은 그 여자의 알몸을 파묻고 있었다 흙이 떨어질 때마다 그 여자는 깔깔 웃었다 멀고 먼 성탄절 나는 Pavese의 詩를 읽었다 1950년 Pavese 自殺, 1950년? 어디서 그를 만났던가 그의 詩는 정말 좋았다 죽을 정도로 좋으니 죽을 수밖에 성탄절 날 Pavese는 내 품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나는 살아 있었지만 지겨웠고 지겨웠고 아무 데도 살지 않는 愛人이 보고 싶었다 키스! 그 여자가 내 목덜미 여러 군데 입술 자국을 남겨주길…… Pavese는 내 품에서 천천히 죽어 갔다 나는 그의 故鄕 튜린의 娼女였고 그가 죽어 간 下宿房이었다 나는 살아 있었고 그는 죽어 갔다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_ <성탄절>, 이성복


젊은 날, 이성복의 <성탄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난 하루 종일 코만 푸는 심정으로 그이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 애인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생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 혼재돼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생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메타포가 아니다. 어미가 제 목숨을 걸고 생을 낳을 때, 그는 곧 죽음을 낳는 것이기도 하다. 누누이 말했듯, 존재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직면해 있다. 어쩌면, 죽음을 직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불멸성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 말하지만, 생의 욕망에 따라, 아직은 부재하는 타자를 소환해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성탄절 날, 그이의 눈 묻은 구두를 볼 수 없다면, 아무 데도 없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알몸으로 벗긴 생의 욕망은 매장되고, 내가 그토록 끌어안고 싶었던 그것은 흙이 떨어질 때마다 깔깔 웃으며 나를 비웃는다. 그때, ‘있지 않음’으로서 ‘없음’은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으며, 존재와 부재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러니, 파베세는 스스로 존재함을 멈추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시인이 죽을 만큼 좋아한 파베세가 궁금해 대학 도서관을 뒤진 기억이 난다. 그이의 시가 좋았던가. 잘 모르겠다. 다만, 시인이 파베세의 시를 죽을 만큼 좋아한 이유를 알 수 있었고, 그이의 시가, 파베세의 시를 닮았다 생각했다. 파베세는 마흔둘에 스스로 무화되었다. 무화되기 전, 그는 아무 데도 살지 않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거절당했으며, 자신이 아끼던 작품 《레우코와의 대화》 첫 페이지에 유언 같은 낙서를 남겼다. “나는 모두를 용서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되었는가? 너무 수다 떨지 말기를.” 부재를 채우지 못한 존재가 스스로 존재함을 멈추면서, 존재와 부재의 불일치를 단번에 해소하기로 하면서, 말한다. 모두를 용서한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아무 데도 없었던 당신을 용서한다. 아무 데도 없었던 나를 용서해 달라. 그것으로 되었다. 내가 존재와 부재의 불일치를, 이렇게 해결하기로 한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 아무 데도 없었던 당신에 대해, 아무 데도 없었던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집에서 달아나기 위해 길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은/ 소년이나 하는 일, 하지만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하는/ 이 사내는 더 이상 소년도 아니고,/ 집에서 달아난 것도 아니다.
여름날의 오후/ 광장마저 텅 비어 있고,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 사내는 쓸모없는/ 가로수 길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다./ 더욱 외로워지기 위해, 홀로 있을 필요가 있을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광장과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지나가는 여자라도 있으면,/ 말을 걸어 함께 살자고 해볼 텐데./ 아니면, 혼자 중얼거려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밤에 술 취한 사람이 말을 걸고/ 자기 인생 계획을 늘어놓기도 한다.
물론 황량한 광장에서 누군가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은/ 이따금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둘이라면/ 함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여자가 머무는 곳이/ 곧바로 집이 될 수도 있으니, 해볼 만하다.
밤이 되면 광장은 다시 황량해지고/ 배회하는 이 사내는, 쓸모없는 불빛 사이에서/ 집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눈을 들지도 않는다./ 자신의 손처럼 거친 손으로 다른 사람들이/ 만든 돌포장 길을 홀로 느낄 뿐이다./ 텅 빈 광장에 남아 있는 건 옳지 않다./ 애원하면 집으로 이끌어줄/ 그 거리의 여자가 분명 어딘가 있으리라.
_ <피곤한 노동>, 체사레 파베세


피곤에 절은 존재는 거리를 배회한다. 더 외로워지기 위해 홀로 있는다. 단 한순간도, 부재를 채워보지 못한 그는, 누군가를 만날 기대도 없이, 눈길을 돌려 집을 바라보지도 않고, 텅 빈 광장에 서 있다. 아무 데도 살지 않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혼자 중얼거리며, 그저 피곤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돌포장 길을 홀로 느끼며, 남아 있다. 그가 텅 빈 광장에 남아 있는 건, 어쩌면, 부재를 채우지 못한 자신의 텅 빈 영혼과 공명하는 공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파베세가 서둘러 무화된 이유를, 나는 알겠다.


부재감을 끌어안고 살았다. ‘있지 않음’으로서 ‘없음’을 채우지 못해, 그저 무화되기만을 꿈꾸며 살았다. 그건 희망이 아니었다. 기형도가 말했듯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니던가. 그러니, 부재를 채우지 못해 무화되기를 바라는 걸, 희망이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희망이란 좋은 것인가. 다시 기형도는 말한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욕망이 사라졌다. (…)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부재감을 끌어안을 때, 나는 희망하지 않기로, 아니 욕망을 그리워하지 않기로 한 것이며,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에 지쳐, 차라리 무화되기를 꿈꾼 것이다. 정말인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허나, 난, 다시, 속절없이, 수화기를 들고, 아무 데도 살지 않는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기형도보다도, 파베세보다도, 오래 산 나는, 여전히, 생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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