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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Nov 24. 2022

경멸할 만한 삶이지만,

당신이 보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관측 가능한 우주에 수천 억 개의 은하가 있고, 은하 하나에 수천 억 개의 별이 있고, 지구는 수천 억의 수천 억 중 하나이고, 지구에 1000만 종 넘는 생물이 존재하고, 1000만 종 중 하나인 인간의 수는 80억 명에 근접해 있고, 난 그중 한 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다 보면, 그러하니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여기기보다는, 아,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는 이 실존이란 얼마나 작고 부질없는 것인가, 깨닫게 된다. 더욱이, 이 부질없는 실존을 부지하려 오늘도 밥숟가락을 드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노라면, 사는 일을 경멸하지 않을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제는,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 화라기보다는 항의였는데, 그이는, 이를테면, 출판 일로 치자면, 저희들끼리 기획하고 편집하고 출간한 책을 두고, 아무것도 나누지 못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제껏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저기 한쪽에 앉혀둔, 내부에 있는 외부인에게, 보도자료를 써보라는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항의하자, 그제야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뭔가 잘못 전달된 모양인데, 그건 당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내가 바란 건, 그저 이러저러한,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에게 맞는, 이런 일이라고. 그러자, 나는, 역시나,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것은, 경멸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느닷없이 고고학을 공부하러 간, 죽은 시인의 마음이 이해된다. 아니, 죽은 시인이, 느닷없이 고고학을 공부하러 간 마음이 이해된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아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얼마나 많은 당신이 매장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열었던가. 매장된 마음을 차마 말할 수 없어, 얼마나 오래 입을 다물었던가. 아, 얼마나 많은 상처가, 저를 부비며, 킥킥, 울었던가. 아, 그이는 기어코, 존재의 심연에서 무엇을 발굴하려 했던가. 아, 우리는 시간의 우물에서, 무엇을 길어 올리려 했던가. 오랜 유물 속에서 발견해낸 건, 시간이었을까, 말이었을까, 썩어 문드러진 존재였을까. 감히, 그이의 죽음을 입에 올릴 수 없다. '가기 전에 써야 할 시들이 몇 편' 있었던, '내일 가더라도' '쓸 시가 있으면 쓸 수' 있었던, 아니 쓰고 싶었던, 그이의 마음을,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다. 허수경이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을 출간한 것은 서른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이가 시를 쓰며 생과 존재의 고통과 허기에 천착하던 나이에, 난 그저 던져진 삶 속을 부유하며, 부유하는 생에서 또 다른 부유물을 만들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이가 <혼자 가는 먼 집>을 쓰며 슬픔을 킥킥거릴 때, 킥킥거리는 마음을 매장하고 고고학을 공부하러 갔을 때, 난 기꺼해야 술을 마시며, 아무 데도 없는 애인을 그리워하며, 기형도가 떨어뜨린 사각 서류 봉투를 생각하며, 불행한 척하고 있었다.


부유하던 마음이, 수십 년을 둥둥 떠다니던 마음이, 어느 바닷가에, 악취 나는, 부패된 부유물처럼 널브러져 있는 걸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여기 있었구나.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당신을 부르고 싶었어. 당신을 부르고 싶지 않았어. 당신이 죽었으면 했어. 실은, 당신이 보고 싶었어. 여기 널브러져 있지 마. 내가 당신을 묻어줄게. 다시 봄이 오면, 고고학을 공부하지 못하는 대신, 흙을 파고 싶지만, 땅이 녹지 않으면 어떡하지. 겨울이 계속되면 어찌하지. 매장된 마음을 꺼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다시 봄이 오면, 시를 쓰지 못하는 대신, 당신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싶지만, 당신이 참혹하면 어떡하지, 당신이 킥킥 울면 어찌하지, 당신이 '나'이면 어떡하지. 시를 쓰다가 고고학을 공부하러 간 그이보다 오랜 시간 존재할까 봐 걱정이다. 난 그보다 더 오래 존재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경멸한다, 이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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