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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ul 25. 2023

기어이, 밥을, 삼킨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노동에 따른 피곤 때문인지, 노동으로 인한 피로를 풀겠다는 수작으로 마신 술 때문인지, 며칠 동안 계속된 잇몸 통증으로 밥알을 입에 넣는 것조차 힘겨워하다가, 문득, 딱 지금의 내 나이쯤 되던 어머니가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혼잣말처럼 뇌까리던 말이 생각났다. “잇몸이 뚱뚱 부었어.” 잇몸이 아프다던 어머니는 단단한 칫솔모로 이와 잇몸 사이를 문지르며 피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아프게 문질러야, 피를 내야, 좀 시원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하지만, 거울 속 자신에게 하소연하며, 입을 벌린 채 고통을 고통으로 문질러대던 어머니의 말을, 마음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다지 어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어렸던 나는, 늘 마음의 고통을, 몸의 고통을 호소하던 어머니의 말을,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흘려듣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단단한 칫솔모로 이와 잇몸 사이를 문지르며, 피를 내며, 어머니의 뼛가루를 생각했다. 기껏해야 자그마한 항아리 하나에 담긴 뼛가루 속에, 어머니와 고통을 함께한 그 치아의 뼛가루도, 한줌도 안 되는 그 하얀 먼지가루도 섞여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빵을 좋아했던 이유는 사실 빵 자체의 맛보다 그놈의 부실한 이와 잇몸 때문이었다. 그이가 비교적 부드러운 빵을 좋아했던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밥보다는 죽을 좋아했고, 된밥보다는 진밥을 좋아했으며, 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도 좋아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했다기보다 그런 방식으로 먹는 것이 음식을 섭취하기에 더 수월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무른 삶처럼, 무른 밥을 먹으며, 무른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견디고 있었다. 아버지가 청한다. “여보, 된장찌개에다 밥 먹자.” 어머니가 말한다. “아냐, 난 빵으로 때울래.” 가뜩이나 음식 솜씨가 좋지 못한 어머니가 끼니를 때우자는 말을 하는 것을, 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어머니가 새로 지어 내놓은 밥도, 반찬도, 냉장고에서 꺼낸 오래된 음식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그이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존이 시작되는 입구멍의 고통이, 입구멍의 고통에서 비롯된 뱃주머니의 불편함이, 뱃주머니와 이어진 똥구멍의 답답함이, 그이로 하여금 먹는 일을, 사는 일을 즐거운 것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마당 고양이에게, 편의점 앞 고양이에게 밥을 먹일 때마다, 녀석들이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을 볼 때마다, 난 늘 안쓰럽고 딱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런 마음을 내비칠 때면, 아내는 핀잔을 주곤 한다. “밥 먹는 모습이 예쁘고 귀엽구먼, 뭐가 안쓰럽다는 거야?”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아이가 어릴 적, 입을 오물거리며 밥을 먹을 때에도, 난 그게 마냥 사랑스럽고 귀엽지만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무엇, 살자고 먹는 일에 대한 안쓰러움이, 그 어린것에게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자고 먹는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면서, 살자고 먹는다. 어머니는 치매와 당뇨 합병증과 허리 골절로 누워 지낼 때에도, 수시로, 외치곤 했다. “배고파! 밥 줘!” 어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생존의 끈은, 생존의 욕구는, 결국 배고픔이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무엇을 위해 아직 살아 있는지 모르면서도, 여전히 배고파했던 거다. 마지막 숨을 뱉기 전날, 어머니는 무엇을 먹었을까. 마지막 숨을 뱉던 날, 어머니의 뱃속에는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아버지, 그날 저녁 어머니의 입구멍으로 무른 생존이 넘어갈 적에, 아버지, 어머니가 무엇을 삼키고 있었는지 기억나시는지요.


노동에 따른 피곤 때문인지, 노동으로 인한 피로를 풀겠다는 수작으로 마신 술 때문인지, 며칠 동안 계속된 잇몸 통증 때문에 밥알을 입에 무는 것조차 힘겨워하면서도, 기어이 밥을 욱여넣으며, 입구멍에서 뱃주머니로 생존을 밀어 넣으며, 기어코 살아내려는 내가 비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생존을 입구멍으로 삼키면, 아마도 그다음 날, 늦어도 며칠 안에는, 아직 생존해 있음을 알리는 삶의 찌꺼기들이 똥구멍으로 배출될 것이다. 입구멍에서 똥구멍으로, 이 기다란 생존 구멍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고, 난 오늘도 기어이 밥을 삼킬 것이다. 어머니, 아무런 감흥도 없는 생존을 씹지도 못한 채 삼켜 넣으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요. “아들아, 난 이제 그만 죽고 싶구나.” 정말인가요, 어머니. “배고파! 밥 줘!”


어머니, 저도 가끔은, 배가 고파요. 실은 매일, 배가 고파요.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는데,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_ <강>, 《남해금산》,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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