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Jul 18. 2023

삶이라는 소설,

이토록, 가볍고도, 무거운,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 준비도 없이 닥친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삶의 첫 번째 리허설이 삶 그 자체라면 삶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 데 비해, 우리 삶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_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그이의 소설을 읽던 20대 젊은 날이 생각났다. 그때 난 존재의 삶이 너무 무겁고 처연하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실제 삶의 모습은 종잇장처럼 가벼워, 바람결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던 삶은, 때론 흙탕물에 젖었고, 때론 어느 집 담벼락에 걸려 찢어졌으며, 때론 지나가던 이들의 구둣발에 짓이겨졌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부유하는 삶이었고, ‘인생을 증오한다’던 기형도를 가슴에 품은 채 길 잃은 개처럼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보면, 삶 따위, 증오할 것도 없었다. 어느 종에게든, 삶은 본질적으로, 종을 계승해 나간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종을 계승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존재하게 된 인간 개체의 의식이 삶을 사랑하게도 만들고, 증오하게도 만든다. 늘, 호모 사피엔스의 그 의식과 생각이 문제였다. 우리 인간은, 각자, 삶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허상이다.


삶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인가.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같은가. 한 개인의 삶, 개인의 의식에만 집중한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은 말은 아니다. 삶은 대체로 ‘최초의 경험’으로 경험되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리허설이 끝나면, 우리는 곧 무화되어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야 한다. 대본을 수정하고, 무대장치를 재점검하고, 연기의 디테일을 보완하여, 완벽한 생을 상연할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삶은 애초에 완성될 수 없었다. 삶은 기껏해야 ‘계승’되는 것,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나라는 개체가 불완전한 삶 끝에 죽음에 이른다 해도, 완성되지 못한 채 무화된다 해도, 인간이라는 종이 완벽하게 절멸하기 전까지, 인간 존재의 삶은 이어져 나가게 될 게다. 종 전체의 서사와 연대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 번만 사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같다’는 생각 같은 자기의식 과잉의 허무주의에 매료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쉽지 않은 문제다. 나는 늘 무의미하게 ‘부유하는’ 삶이 너무 ‘무겁다’고 여기곤 했다. 이 얼마나 모순되는 생각인가. 리허설이 곧 삶 자체라서 결국 부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인가. 그런 삶이라면, 마땅히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닌가. 기껏해야 연애와 치정, 그에 얽힌 결과물들로 이어진 것이 생이라면, 종의 계승이나 삶의 연대기 같은 거창한 수사는 집어치우고 좀 더 솔직하게 생의 민낯을 인정해야 한다면, 존재는 마땅히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내 앞의 생이나, 내 뒤의 생 따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생이 아니다. 나는 한정적인 존재다. 우주로 날아갈 것도 없이, 저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다보기만 해도, 저 너머 바닷가에 나가 뒤돌아보기만 해도, 내 삶은,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희극일 것도, 비극일 것도 없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무의미를 허무해할 필요도 없이,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한 점일 뿐. 사실을 말하자면, 그토록 가벼운 것이 생이기에, 인간의 의식은 생을 너무나 무겁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너무 가벼워서 무의미하게 흩어져버리는 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순간, 부유하던 존재는, 생의 중력과 함께 지상으로 곤두박질친다.


이건 좀 이상한 이야기다. 생의 중력과 함께 곤두박질칠 때, 항상 이야기되는 것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기실, 인간 개체가 써 내려가는 삶이라는 소설을 이루는 허상이었다. 오, 난 당신을 열렬히 사랑해요. 당신과 함께 이 삶을 충만하게, 의미 있게 채워 나가고 싶군요. 나와 삶을 함께하겠어요? 정말인가. 혹, 이런 것이면 안 되는가. 오, 난 당신과 자고 싶어요. 당신과 다음 세대를 잉태하고 싶어요. 그렇게 이 생의 사멸을, 존재의 죽음을 연기하고 싶어요. 생을 이어 나가고 싶어요. 물론, 과장된 이야기다. 모든 인간 개체가, 죽음을 연기하기 위해, 생을 이어 나가기 위해, 짝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다음 세대를 잉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이 삶이라는 소설을 써 내려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사랑’이란, 인간 종이 세대를 이어 나가기 위해 진화시켜온 특이한 화학반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화학반응 그 자체로 본다면, 삶은, 존재는, 한없이 가볍다. 허나, ‘사랑’이라는 허상을 덧입혔을 때, 존재는 생의 중력과 함께 지상으로 곤두박질친다. 어느 날, 당신은 무의미하다는 말도 무의미한, 이 생을 부여잡기 위해, 모든 것을 사랑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본을, 권력을, 명예를, 직위를, 실은 생의 욕망을. 오, 난 당신을 열렬히 사랑해요. 실은 당신과 자고 싶어요. 나와 죽음을 연기하며, 자본을, 권력을, 명예를, 직위를, 실은 생의 욕망을 대물림해 나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시대가 존재를 가볍게 만드는가. 그리하여 그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가.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인가. 역사 속에 인간이 있는가.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지상의 숱한 존재가 그러하듯, 우주의 무수한 존재가 그러하듯, 우리도 우연히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다. 가끔은, 이토록 보잘것없는 생이 존재하려고, 내 앞의 숱한 존재들이 억겁의 세월을 가로지르며 진화와 짝짓기와 재생산을 거듭해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면, 막막하고 허허로운 마음을 가눌 수 없게 된다. 한 개체로서도, 인간 종으로서도, 지구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로서도, 언젠가는 이 끝 모를 죽음의 연기가 종결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시대가 존재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날 이 막대한 연결고리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자각이, 존재를 가볍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거워지려 할 것이다. 생의 욕망을 사랑하므로. 당신과 생의 욕망을 잉태하고 싶어 하므로. 이 리허설이 욕망의 대물림을 거듭하며 완성된 무대로 상연되기를 욕망하므로. 그 욕망이 초안뿐인 이 삶의 무의미를 잊게 해줄지도 모르므로. 한 번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착각, 혹은 욕망의 늪에 빠져 몸부림치게 해줄지도 모르므로.


이 생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실은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도, 기어이 그날이 올 것임에도, 구태여 기다리는 것, 이것도 결국 생의 욕망인가. 문득, 내 삶의 초안, 밑그림을 들여다본다. 누렇게 해진, 백지 위에, 아무런 그림도 없이, 그저 단 한 문장이 씌어 있다. 태어나, 살았고, 곧 죽을 예정.


태어나, 살았고, 이제 죽어버린 밀란 쿤데라에게. 밀란 쿤데라를 읽던 젊은 나에게. 그 후로도 오래 살았고, 곧 죽을 예정인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이전 09화 물이 되지 못한 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