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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Oct 10. 2023

상실하지 못할 상실,

슬픔과 비탄이 피어날 자리 없는,

삶이 점점 윤기를 잃어간다고 생각하다가, 내게 윤기 있는 삶이 존재한 적 있던가 곱씹는다. 막연히 젊은 날을 되짚어본 적 있다.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되짚어본 게다. 젊어, 우울의 늪에 빠져 살았으니,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 생각한 적 없지만, 그저, 생이 쇠락해 가는 모습을 목도하다가, ‘생물학적’ 젊음을 ‘뒤늦게 부러워하기도’ 하는 듯하다. 우울을 능히 더 강렬하게 우울해할 수 있었던 젊은 육신과 정신을 가만히 더듬어보는 거다. 초로의 나이를 관통하며 잡아보는 우울은, 철 지난, 빛바랜, 흑백영화 같다. 初老.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늙기 시작하는 첫 시기. 주로 45~50세를 이름.’ 쉰이 훌쩍 넘은 나는, 그러니, 사전적 의미로, 이미 늙은 것이다. 늙어버린 내가 잡아보는 우울은, 해질 대로 해진 필름에 영사되는, 줄이 비처럼 내리는, 주인공은 목놓아 울부짖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촌스러운 옛 활자가 자막으로 흐르며 그이가 슬픔에 빠져 있음을 ‘설명해 주는’, 무성 흑백영화 같은 감정인 게다.


가을이 태양의 고도를 낮추며, 집 안으로 길게 드리워진 햇살 아래, 오월이 서성거리며 운다. 운다? 좀 더 정확히는 끊임없이 나를 보며 말을 건다. 자기를 보라고, 자기 옆에 와 앉으라고. 열네 살, 늙어버린 고양이는 오직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오직 내가 쓰다듬어주기만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잠 아닌 잠에 빠졌다가, 울음 같은 말을 건네며 나를 채근한다. 햇살 아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오월의 몸을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네게도 그리 긴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엔가, 너도, 박제와 같이 굳어버렸던 날두처럼 식어갈 테고, 너와 나의 시간은 그것으로 끝나겠지. 생각해 보니, 열네 해 동안, 너와 내가 나눈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구나. 너는, 늘, 나를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견뎠지. 생각난다. 너와 처음 살았던, 반투명 유리가 박힌 현관문 너머, 내 발자국 소리를 따라 뛰어나와, 문에 매달리던 너의 실루엣. 이제는 뛰어나올 수조차 없는 너는, 가만히 거실을 서성이며, 내게 시간을 나누어달라 말할 뿐. 너를 쓰다듬으며, 네 몸에서 나는 햇살 냄새를 맡으며, 문득, 나는, 흑백영화 같은, 슬픔에, 우울에 잠긴다. 네가, 언젠가, 가뭇없이 사라져, 내 손이 허공을 휘저을 때, 내 손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햇살을 움켜쥘 때, 내 생도 좀 더 허물어져 가겠지. 그러나, 너는 알고 있으려나. 네가 나를 잃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너를 잃는 것도 아니니, 우리가 잃는 것은, 그저, 기억되지 못할 생이니, 잊으렴, 너와 나의 시간을, 나도, 잊을 테니.


Geometry of Grief. ‘수학의 위로’라 번역된 책에서, 저자는 막대한 슬픔, ‘비탄(grief)’을 가져다주는 ‘상실’의 전제 조건에 ‘비가역성’, 즉 결코 되돌릴 수 없음을 언급하면서도, 이에 더해, 단순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자신이 상실해 온 삶과 존재에 대한 ‘사랑’을 덧붙인다. 즉, 마음 깊이 사랑하던 존재와 삶, 혹은 삶의 방식을 돌이킬 수 없이 상실하는 것에서 오는 막대한 슬픔이 비탄이라는 것이다. 그이는 자신이 사랑하던 가족을 잃으며, 자신이 전 생애를 바쳐 사랑하던 업을 상실해 가며, 비탄에 빠진다. 그러나 그이는 비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 비탄을 넘어 여전히 생을 확장해 가는, 생을 이어가는 방식에 대해 ‘기하학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바로 프랙털 기하학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자기 유사성’을 생에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삶의 방식, 자신과 함께 나누었던 시공간의 이야기들을, 사랑을, 남은 존재들과, 이웃과 나누며 확장해 나갈 때, 상실의 비탄을 비탄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생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그이에게 상실로 인한 빈자리는, 오롯이 비탄으로 가득 찰 끈적끈적한 늪이 아니라, 다음 생이 피어날 습지와도 같은 것이다. 거기서, 자기 유사성을 띤, 연꽃이, 연꽃잎이 피어날 게다.


그런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월이 무화되면, 우리는 더 이상 고양이를 집으로 들이지 않겠지만, 여전히 마당 고양이를 먹이며, 그들과 교감하며, 날두와 오월을 기억할 것이고, 다른 존재와 온기를 나누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들이 여름 한낮 땡볕을 피해 처마 밑 그늘에서 낮잠을 잘 때, 한겨울 우리가 마련한 조그만 공간에서 서로의 몸에 의지해 맹추위를 견뎌 낼 때, 우리가 건넨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면할 때, 우리는 날두, 오월과 나누었던 시간과 공간을 기억해 낼 것이고, 그것으로 상실의 빈자리를 채워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아닌, 내 원가족에게, 지나가버린 삶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조금 막막한 마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거기, 상실하지 못할 상실이, 가만히 똬리를 튼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이들을 상실할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히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도 사랑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상실은 슬픔을, 비탄을 낳지 않았고, 비탄을 이겨내는 방식으로 삶을 확장해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건, 그저 소멸해 가는 것뿐이었다. 할머니가 소멸했고, 형이 소멸했고, 어머니가 소멸했고, 이제 아버지가, 내가, 누이가 소멸해 갈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삶과 사랑하지 않는 존재의 소멸에, 상실과 비탄이 피어날 자리는 없다.


상실과 슬픔, 비탄의 이야기는 곧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이 윤기를 잃어간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윤기 있는 생이 존재한 적 있었나 자문한 건, 이 생에, 정말, 사랑의 이야기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게다. 이 이야기의 한쪽 끝에서, 언젠가, 사랑이라 ‘믿은’ 무엇이 촉발되어 갖가지 보잘것없는 서사가 생성되어 왔지만, 이 생성과 소멸의 이야기에 막대한 슬픔이 자리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사실 우리는 (믿음이 아닌 실제에 있어서) 사랑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상실할 수조차 없었던 거다. 내가 상실했다 믿었던 건, 길게 드리워진 햇살 아래 가뭇없이 사라진 오월을 생각하며 허공을 움켜쥐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이들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이들이 나를 잃은 것도 아니니, 우리가 잃은 것은 그저 생이었을 뿐, 이제 남은 일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잊으며 소멸해 가는 것뿐.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무슨 시간의 기억을 캐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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