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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Dec 12. 2023

욕망의 임계점 앞에서,

우리는 다양성을, 다른 관점을 획득할 수 있을까

출판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책 표지나 광고 디자인 회의를 할 때면, 동료들에게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색깔을 보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길.” 우리가 감각하는 대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동일하게 인식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킨 거였다. 말인즉슨, 함께 뜯어보고 있는 저 표지 디자인이 각자의 주관적 감각 및 감각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으니,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피력하는 데 그치지 말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음을 경청하라는 얘기였다. 물론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내게는 저 색깔이 전체 디자인 구도에서 볼 때 조화롭게 느껴지지 않는데, 맞은편에 앉은 동료는 그걸 아름답다고 하니, 어떻게 공감하고 경청할 수 있겠는가. 사실, 핵심은 이거다. 타자의 생각을 완벽하게 공감해 보라는 게 아니라, 내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에, 내가 세계를 추론하는 방식에,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라는 얘기다. 그러다 보면, 상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진 못해도, 상대의 주장에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내가 미처 인지하고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저이가 알아채고 있을 수도 있다는, 열린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세상이 이렇듯 말랑말랑하고 두루뭉술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표지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는 수준을 넘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세계 안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을 인식하는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면 일이 간단치 않아진다. 20세기 중후반에 태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하고, 밥 벌고, 가족을 꾸리고, 나이 들어온 내게 돈은 언제나 쉽지 않은 문제였다. 젊어서부터 돈이 부족했지만, 하필, 속된 말로 ‘돈이 안 되는’ 업계에서 일했고, 빚진 인생을 살기는 싫다며 대출 따윈 절대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지금 생각해 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금전적 위치로 봤을 때, 사실 대출을 쉽게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젊은 시절에는 전셋집이 지금보다 많았고, 임대보증금이 매년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오르는 형국도 아니었으니,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강제이주하던 시절, 우리는, 급변하는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니, 귀농이니 귀촌이니 하는 우아한 단어보다는, 강제이주가 적확한 표현일 수밖에 없다.


자본과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우선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상태라면 말이다. 나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으로 내 집을 갖고 싶다. 그러나 내가 어엿한 집 소유주가 된 후에는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싼값에 산 집으로,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은 채 앉은자리에서 많은 돈을 벌고 싶다. 물론 경제지표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물가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 가격은 대체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경제 상황에 따른 자연 상승분을 넘어선 부동산 가격 폭등인데, 이에 대한 태도가 이율배반적이라는 얘기다. 물론 많은 개인들은 자신이 이 문제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한다. 부동산 가격 폭등의 문제는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욕망과 무관하다고 말이다. 그건 부동산 투기자본과 부유한 자들이 꾸미는 일일 뿐이다. 마치 기후위기는 탐욕적인 거대 자본주의 기업과 무능한 각국 정부의 이기심 때문에 초래되었을 뿐,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갈 뿐인 내 탓은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듯 말이다. 물론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데도, 부동산 위기를 초래하는 데도, 모두의 욕망이 거대한 덩어리를 이룬 채, 막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오늘도 밥을 벌기 위해, 소비의 최전선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할 것이고, 서울에서는 방 두 칸짜리 전셋집 구하기도 힘든 돈으로 마련한 시골집 값이 장차 오르길, 그래서 나에게 차익을 남겨주길 바랄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어쩌면, 이 지역이 조금은 더 개발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고, 지역 개발이 스스로 비난한 부동산 가격 급등과 기후 위기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할 것이다.


욕망과 욕망의 실현에 대한 관점은 각기 다르다. 현대 자본주의로 올수록, 사람들은 자연선택(혹은 자연도태)의 관점을 인간 사회 메커니즘에도 적용하길 선호하는 듯하다. 욕망을 획득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본을 선점하고, 권력을 쟁취하고, 계급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일을 인간 사회의 자연선택으로 보는 것이다. 열등한 자는 자연도태되고, 우월한 자는 자연선택에 따라 우세종으로 살아남는다. 예전에 어디선가, 의사들이, 의대생들이, 자신들이 의사 면허를 획득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비용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누리는 지위와 금전적 이득은 당연한 거라는 주장을 펼치는 걸 본 적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을, 업계를 망라해, 스스로 승자라 느끼는, 계급의 상층부에 있다고 느끼는 자들이 스스럼없이 발화하는 일을 종종 본다. 그러니까, 이 욕망과 욕망 실현의 관점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생명을 치료하고 살리는 업의 소명과 가치로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돈과 지위로 보상받는 것이다. 돈과 지위로 보상받고 이를 누리는 것이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옳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자들이 이 세계를 완벽하게 점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 세계는 좀 더 일찍 절멸했을 것이다.


경쟁과 자연선택의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이들은, 생물 종이 주변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개체가 살아남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자연선택을 해왔다는 주장에서 일부 사실만을 가져다 쓰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개별 종의 차원에서 보면 주변 환경에, 혹은 주변 환경 변화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 타당한다. 그래? 그럼 무슨 오류를 저질렀다는 거지? 개별 종의 차원에서 바라볼 문제와 생태계 차원에서 바라볼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 확장된 관점이 필요한데, 인간은 개별 종이기도 하지만, 인간 사회는 하나의 생태계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생물계에서 개별 종은 자연선택에 따라 진화하지만, 개별 종은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라는 거대한 세계 내에 있는 숱한 종들과 함께 공생하고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 다른 동물, 다른 식물 종이 부재한 상태로 홀로 생존하고, 홀로 진화하는 존재는 없다.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할 때, 그렇게 진화가 계속된다고 할 때 언급되는 ‘주변 환경’이란 사실상 개체를 둘러싼 생태계 전반을 일컫는 것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인간 종이 문명화되기 전에, 인간도 생태계의 한 종으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해 왔다. 문제는, 문명화된 인간 사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라는 관점이, 다른 종과 공존하는 생태계뿐 아니라, 인간 종 자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거다. 인간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다.


인간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 종은 다른 생명 종과 달리 다채로운 방식으로 생존해 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가 고플 때 사냥하고, 번식기에 짝짓기하고, 여타 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이를테면 전형적인 사자처럼 생존해 나가는 종이 아니다. 현재, 인간은 무척 다채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낸다. 따라서 인간은 생물학적 종이라는 의미로 볼 때 단일한 호모 사피엔스이지만, 삶의 구체적 양태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종으로 분화된 생태계다. 생물학적으로 평등하지만, 생태학적으로는 다양하다는 사실(계급적 차등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마치 침팬지 사회에서 권력과 위계와 번식만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 사회를 그런 계급 구조로만 이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본과 자본이 가져다주는 위계와 권력 구조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생태계에서 가장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할 점은, 생태계 전체가, 생태계를 구성하는 각 개체의 생존과 세계의 지속성을 유지시켜 준다는 거다. 미생물에서부터 각종 식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 종들이 어우러져 상호작용하며 세계를 지속시킨다. 여기에 종 간의 계급적 차등은 없다. 미생물은 하찮고, 힘과 용맹을 자랑하는 사자는 위대한가? 그런 건 없다. 물론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어린 시청자들이라면 박테리아보다는 사자를 더 매혹적으로 바라보겠지만,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미생물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정 직종이 인간 사회에서 특권을 누려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자신들이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으니, 이 사회에서 특권을 부여받아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개별 종에게 국한시켜야 할 관점을 전체 생태계로 확장한다는 데 있다. (다른 모든 개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개체들 사이’에서 더 많은 노력과 비용으로 의사가 되었다는 정도가 합리적인 평가이고, 인간 생태계의 숱한 종들 가운데 의사라는 정체성을 획득해 살아가기로 했다는 정도가 균형 잡힌 평가다. 그런데, 이를 인간 생태계 전체로 확장해, 의사라는 특정 직업군이 생태계에서 특권을 누려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스스로 선택한 직업의 특성이나 소명에서 자기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다주는 돈과 돈으로 빚은 권력의 논리로 이를 치환하기 때문이다. 이때, 특정 직업은 그 직업이 생태계 내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아니라, 자본으로 정의된다.


생태계 내에 다른 존재들이 부재한 상태에서 특정 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해당 종은 생존할 수 없고, 곧 절멸할 것이다. 인간 생태계 내에 다른 존재들이 부재한 상태에서 특정 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존할 수 없고, 곧 절멸할 것이다. 건설 노동자도, 회사원도, 우체부도, 환경미화원도, 의사도, 검사도, 교사도, 그 외에 수천, 수만의 정체성들도 생태계 내에서 다른 존재들과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고, 존재의 생존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의사는 자기 배를 가르려나?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검사는 자기 자신에게 죄를 물으려나? 하지만, 부질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다채로운 종이 공존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세종이 열세종을 잡아먹고 승리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믿어버리면, 그러한 믿음이 주류를 이루면, 인간 사회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은 완전히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태계 내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믿음, 우세종이 되어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만이 생존을 담보해 준다는 믿음이 공고해지면,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사다리를 오르게 해주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확신이 자리 잡으면, 앞에서 언급한, 부동산 가격에 대한 이율배반과 같은 자가당착에 빠져 어떻게든 ‘자기 자신만’ 돈을 벌면 된다는 몰염치가 상식이 되는 세상이 될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미 그러한 세상이 온 것 같기도 하다. 이율배반과 자가당착이 상식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어둔 욕망을 실현하는 데 일조하는 모리배들에게 투표할 것이고, 생태계 내 종의 다양성과 생태계 내 종의 평등을 주장하는 존재들에게는 돌팔매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생태계는 이미 파괴된 지 오래고, 오직 ‘돈’이라는 절대 종 한 종만이 살아남아, 나머지 대부분의 종들은 돈에 기생하며 사는 듯도 하다. 그러니, 돈에 기생하지 못한 종은 도태될 것이고 절멸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제 운명을 알고 있으려나. 돈에 기생하며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모두로 인해, 곧 인간 생태계를 넘어, 지구 생태계가 절멸하게 되리라는 걸. 욕망이 낳은 욕망이, 욕망이 낳은 부동산 위기가, 곧 기후 위기라는 걸 알고 있으려나. 멋진 식당에서 근사한 요리를 먹고, 가상공간에 연출된 사진을 올리고, 핫플레이스 여행 인증 사진에 목을 매고, 온갖 음식을 양껏 먹는 걸 자랑하고, 너도나도 쉽고 빠르게 자본을 축적하는 일에 혈안이 되고, 축적된 자본으로 다시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하는 우리가 곧 욕망이고, 욕망이 낳은 욕망이고, 욕망이 낳은 부동산 위기이고, 욕망이 낳은 기후 위기라는 걸 알고 있으려나.


표지 디자인 시안을 둘러싼 출판사 각 구성원들의 풍경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자본을, 권력을 쥔 자가 모든 걸 결정할 것이다. 돈을, 권력을 쥔 자가 모든 걸 선택할 것이고,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지 결정할 것이다. 표지 결정을 한 권, 두 권, 반복해 실행하면서 모든 구성원들은 학습할 것이다. 다양한 생각은 말살될 것이고, 각자의 관점은 무시될 것이며, 돈과 (사소한) 권력이 표지 디자인을 결정하게 되리라는 걸. 또한 구성원들은 순응할 것이다. 디자이너는 돈이 원하는 결과물을 쏟아낼 것이고, 구성원들은 돈이 원하는 시안에 표를 던질 것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 다른 관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이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으려면, 우선 다양성 그 자체가 존중되고 공존되어야 한다. 그 지평이 사라졌을 때, 그 기반 자체가 무너졌을 때, 다른 시각, 다른 관점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그리고, 다양성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내 욕망의 획득, 내 욕망의 승리만이 지상 최고의 과제라는 탐욕스런 관점을 내려놓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미친 부동산 가격의 세상이 종식되길 원한다면, 나 역시 부동산 따위로 잉여 자본을 획득하겠다는 욕망을 내려놓겠다고 결정하는 것, 미친 돈의 세상이 종식되길 원한다면, 나 역시 적은 노력으로 큰돈을 버는 일확천금의 꿈을 꾸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 미친 기후 위기가 종식되길 원한다면, 나 역시 소비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으며 절제하겠다고 결정하는 것. 쉬워 보이나? 내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나는 내일도 이 비루한 삶을 이어가겠다고, 소비의 최전선으로 나가 일하고, 돈을 벌 것이며, 그 돈으로 또 내 욕망을 사고 소비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뻔하지 않은가.


욕망의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 생태계에도, 지구 생태계에도. 멈출 수 있을까? 이를 멈추기 위한, 다양성을, 생태학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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