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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Nov 16. 2023

뒷모습에게,

고독에게, 외로움에게,

이를테면, 뒷모습 같은 글도 있다. 단어를, 문장을, 행간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그이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이는 거다. 그런 글을 만나면, 보이지 않는 내 뒷모습을 읽는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는다.


누가 길 가던 혹자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겠는가. 누가 길 가는 내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해 주겠는가. 그러니, 존재가 존재의 뒷모습을 읽는다는 것에는, 그저 사물의 뒷면에 대한 감각 정보를 자동적으로 수집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게다.


마음을 발화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당신을 싣고 갈 버스가 온다. 버스에 오르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차창 너머 빈자리에 앉는 당신의 옆모습을 보고, 무심히 자동문을 닫으며 출발하는 버스의 뒷모습을 본다. 시야가 허락하는 가장 먼 곳까지 버스를 뒤쫓을 때, 내가 바라보는 것은, 그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버스의 뒷면이 아니라, 당신의 뒷모습이다. 당신의 뒷모습을 좇다 보면, 경유지일 뿐인, 목적지에 내려, 후미진 골목 한 귀퉁이 거처로 발길을 옮기는 당신의 쓸쓸한 등이 보인다. 서러웁다.


그러니까, 뒷모습을 응시한다는 건, 방금 허기진 배를 채우고는 한 끼 잘 먹었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이의 영혼이 허기져 있음을 읽는 것이고, 실은 그 마음의 굶주림이 허덕이는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읽는 것이다. 마음의 질병과 물질의 질병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사실,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놓는 것이다. 마음이 물질을 집어삼키지 않게, 물질이 마음을 집어삼키지 않게. 입에 문 꼬리를 놓은 마음이 비로소 말문을 연다. 아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어머니가 무화된 후 한동안, 빵모자를 눌러쓴 늙은 여인의 뒷모습을 좇은 적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영처럼 그 여인들을 포착해 낸 게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듬뿍 받았는지, 노년에 이른 어머니는 탈모가 점점 심해져 괴로워했다. 그러니 어머니에게, 빵모자는, 멋들어진 패션이라기보다, 늙어버린 여인의 자존심 같은 거였을까. 막 죽은 어머니는, 자존심도 없이, 빵모자도 없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맨머리를 하고 누워 있어서, 난 그이의 얼굴부터 머리카락까지를, 가만히 쓸어 올렸더랬다. 빵모자를 눌러쓴, 늙은 여인의 뒷모습을 만날 때마다, 죽은 어미가 다시 살아 현현한 것도 아닌데, 화들짝 놀라서는, 그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는데, 그건 아마도, 어머니의 뒷모습이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자존심도 없이, 빵모자도 없이, 돌아누워 있곤 했던, 어머니의 뒷모습, 난 그게 참 쓸쓸해서, 차마 오래 볼 수 없어서, 그이가 누운 방문을 가만히 닫아버리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고 시절, 버스에서 공연히 눈싸움을 걸어오던 누구에게 지지 않고, 너 내리라며 호기를 부리던 소녀였고, 내 소년 시절 운동회 날, 학부모 달리기를 할라치면, 이 악 물고 1등을 차지하던 여인이었다. 그런가? 아니다. 어리석은 소리다. 삶의 시간이 켜켜이 쌓일 때마다, 존재의 발걸음이 하나둘 옮겨질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뒷모습, 삶의 속살, 존재의 이면을, 어린 내가, 어리숙한 내가, 읽어내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러니, 또래와의 기싸움에 물러서지 않던 소녀도, ‘색씨집’의 나날 무참하게 가라앉던 소녀도, 악바리같이 달리던 여인도, 쓸쓸하게 돌아누운 여인도, 언제나, 함께 있었던 거다. 어머니, 미안해요. 언젠가 말했듯, 난, 무정한 자식이었어요.


글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사람을 읽는 일이기도 해서, 또 때로, 사람의 뒷모습을 읽는 일이기도 해서, 난, 어머니가 남긴 글을 읽을 때마다, 처연한 마음이 스며 나오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어머니의 뒷모습이 처연해서만이 아니라, 그 뒷모습을 품은 존재가, 이제는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고, 그이가 흔적도 없이 무화되기 전, 그 뒷모습을 안아준 적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 역시, 때로, 자기 존재를 쓰는 일이기도 해서, 또 때로, 자기 존재의 뒷모습을 쓰는 일이기도 해서, 난, 어머니가 마음을 쓸 때, 자기 삶의 속살을, 자기 존재의 이면을, 힘겹게, 안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에게도 발화하지 못할, 누구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뒷모습을, 품고 있었을 게다.


나 또한, 쓰면서, 나를, 나의 뒷모습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이 일기 같은 글을 적는 것은,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읽기 위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로, 타인의 글을 읽으며, 내 뒷모습을 보기도 하고, 내 글을 다시 읽으며, 타인의 뒷모습을 투영해 보기도 한다. 슬픔이 슬픔과 연결되고, 쓸쓸함이 쓸쓸함과 연결된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미세한 촉수들이, 마치 시냅스를 발화하듯, 서로 공명하고 연결될 때, 존재의 뒷모습들이 오버랩되어 춤을 출 때, 기실 마음은, 비할 바 없이, 더 서글퍼지지만, 그럼에도, 존재의 고독감과 외로움은, 더 풍성해질 게다. 온통 고독으로 가득 찬 고독, 온통 외로움으로 가득 찬 외로움을 상상해보라. 뒷모습을 읽고, 쓰는 일의, 한없는 쓸쓸함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할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_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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