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Jan 09. 2024

끈끈이에 붙어 죽어간 생에게,

혹은 끈끈이에 붙어 살아가는 나에게,

# _ 1


가게에 쥐가 출몰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니었다. 쥐를 봤다고 하자, 각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였다. “맞아요, ○○씨가 엊그제 쥐를 봤다고 했는데….” “아, 맞아요, 여기로 쥐가 들어가는 걸 제가 봤어요.” “지난번에도 쥐가 나타나 과자 봉지를 몇 개 쏠아놨는데….” 결론은, 내가 쥐를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 거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호들갑 떨지 않고, 이른바 ‘끈끈이’ 덫을 구입해 가져다 달라 했다. 주인장은 지체 없이, 냉큼, 끈끈이 덫을 사다 내게 안겼다. 내가 퇴근하기 전에 설치하기를 바랐고, 이른 아침에 가게 문을 여는 내가 끈끈이 덫의 결말을 책임지길 바랐다. 끈끈이가 설치된 곳은, 쓰레기통이 놓인 공간 뒤편, 벽 아래쪽으로 뚫린 작은 구멍이었다. 그곳으로, 녀석이 들어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에는 대개 쥐가 많았다. 겨울나기용 연탄을 쌓아두는 광에서도, 생활공간과 분리돼 외부에 있던 재래식 부엌에서도, 마당 저쪽 끝에 있는 화장실 주변에서도 쥐를 만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잠자리에 들어 누워 있을라치면 천장 위로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적잖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야옹’ 하며 고양이 소리를 내곤 했는데, 쥐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달음박질을 치곤 했다. 가끔은, 그 허술한 천장 아래로 쥐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가슴 졸인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와 주거 공간을 공유한 것은 쥐뿐이 아니었다. 눅눅해진 장판을 들추면, 그 아래 꼬물거리며 모여 있던 쥐며느리들, 낡은 이불장과 벽 사이사이 빈 틈을 빠르게 질주하던 ‘돈벌레’들, 언제나 우리의 밥그릇을 노리던 파리, 파리들,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게, 폴짝폴짝 잘도 뛰어다니던 귀뚜라미들, 음식 부스러기라도 흘릴라치면 귀신같이 모여들던 개미들, 그리고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존재들.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벌레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정해야겠다. 벌레들을, 곤충들을, 무서워했다. 그리하여, 소년기 남자아이들이 사마귀나 메뚜기를 붙잡아 장난질을 할 때에도 난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했고, 잠자리 날개를 잡았다가 다시 날리는 놀이를 할 때에도 난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했다. 그러니, 또래들이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을 때, 언감생심 그걸 함께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난,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 내가 후일 성인이 되어 시골살이, 귀농을 해보겠다고 한 건, 참 웃기는 일이었다.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처음 농사일을 해보겠다고 내려간, 어느 농촌 마을에서, 자라나는 배춧잎 뒤에 붙은 진딧물을 손으로 털어낼 때 겁을 잔뜩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벌레들에 대한 공포의 최정점에 있었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서울살이에서 목도한 바퀴벌레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두렵게 했던 건, 망원동 반지하방에 살던 시절, ‘발소리를 내던’ 거대 바퀴였다. 그거 정말 발소리였다. 화장실 문을 열고 거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실)로 나가다가, 그 커다란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던 바퀴벌레의 ‘얼굴’이 기억날 지경이다. 녀석 혹은 녀석들의 공습은 그게 끝이 아니어서, 어느 날인가는 창문 옆 커튼에 매달려 있다가 날개를 활짝 편 채 날아오기도 했고, 어느 날인가는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밤새 뒤척이던 내 몸에 압사한 바퀴벌레의 시신이 배를 드러낸 채 내 옆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서울 반지하 발 바퀴벌레 공습에 비하면, 어린 시절 천장과 벽체 사이를 활개치고 다니던 쥐들의 발소리는 정겹기까지 하다. 다행히도, 쥐들은 천장에서 자유낙하해 나를 덮친 적도, 내 몸에 뭉개진 채 나란히 누워 있었던 적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운명의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쓰레기통이 놓인 공간의 문을 열었을 때, 쓰레기통을 꺼내고 그 뒤 벽체 앞에 놓아두었던 끈끈이 덫을 내려다봤을 때, 거기, 작은 그 녀석이 모로 누운 채 달라붙어 있었다. 잠시 미동도 없던 녀석은, 빛이 들어오고 인기척이 나자, 몸을 꿈틀거렸다. 겁이 많은 나는, 녀석을 끈끈이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내 들에 놓아주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는, 그 꿈틀거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고, 어서 녀석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다. 그런 까닭에, 서둘러, 녀석이 아직 산 채로 죽어가고 있는 그 끈끈이 덫을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고는, 내다 버린 것이다. 이제 되었는가. 쥐는 사라졌고, 녀석으로부터 가게를 지켜낸 것인가.


그날 이후, 쓰레기통을 비울 때마다, 사건 현장을 열 때마다, 난 그 자리에 있던 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좀 더 정확히는 끈끈이 덫에 붙어버린 채 꿈틀거리던 쥐의 몸짓이 아른거렸다. 끈끈이에 포획되어 생매장당한, 아니 산 채로 내던져진 쥐를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거대한 끈끈이 덫에 모로 붙어 버린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우습지 않은 우스갯소리지만, 하필 나는 쥐띠다.) 끈끈이에 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내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꿈틀거릴 때,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치고, 끈끈이와 나는 한 몸이 되어 어둡고 냄새나는 다른 공간에 유폐된 채 내동댕이쳐진다. 어쩌면 나는 ‘지구’라고 명명된 작은 공간에 기생하는 쥐가 아닐까, 쥐며느리가 아닐까, 바퀴벌레가 아닐까,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무엇이, 끈끈이로 쥐를 잡는 나를 내려다보고는, 조금 큰 쥐가 더 작은 쥐를 잡네, 라며 웃고 있지는 않을까,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무엇이, 끈끈이에 붙은 쥐를 연민하는 나를 보며, 자기도 끈끈이에 붙어 있다는 걸 모르는가 보네, 하고 비웃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살아 있는 것은 왜 이토록 무참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가,라는,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말할수록 무참해지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쥐며느리처럼, 그리마처럼, 귀뚜라미처럼, 쥐처럼, 혹은 바퀴벌레처럼, 대체로, 아직 살아 있고, 살아 있기 전에, 우연과 운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존재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이토록 무참하게 살아내야 하지만, 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퍼센트 유사하다는데, 나는 왜 쥐를 아무렇지 않게 끈끈이로 잡아버렸을까. 무참하고 비루하게 사는 걸로 치면, 어둠 속을 숨어 다니는 그 쥐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냥 문을 열어 훠이훠이 저리 가라고 일러줄 수는 없었을까. 너도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으니,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가라고 위로해 줄 수는 없었을까.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그저 나는, 살아 있기로는 매한가지인,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거로는 매한가지인, 생명이라는 차원에서 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그 무엇에 대한 동질감이 나를 사로잡고 있구나, 생각했다.


# _ 2


한여름,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농로 위로 올라서는 개구리들에게 사과한다. 미안해. 지나가다 너희들을 밟을 것 같아. 너희들을 죽일지도 몰라. 미안해. 논둑 위에 앉아 쉬는 백로에게 사과한다. 미안해. 내가 지나가는 바람에 시끄럽지. 내가 질주하며 너희들을 칠지도 몰라. 너희들을 죽일지도 몰라. 미안해. 농로 옆 더러운 우사에 멀뚱히 선 채, 지나가는 나를 바라보는 소에게 사과한다. 미안해. 밥 먹다가 놀랐지. 내가 너희들을 죽일지도 몰라. 너희들을 먹을지도 몰라. 미안해.


요즈음, 어느 매체에서, 낚시를 하는 이들이, 물고기를 낚아 올리고는, 버둥대는 녀석을 들어 올리며 개선장군처럼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을 볼 때면, 얼른 채널을 다른 데로 돌리곤 한다. 고기도 먹고, 생선도 먹는 주제에 별스러운가, 자문하다가, 고기를 먹고, 생선을 먹는다고, 소를 죽이고, 돼지를 죽이고, 물고기를 죽이는 걸, 함박웃음 지으며 즐길 필요는 없잖아,라고 자답한다.


누군가 내게,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살면 된다고 말한 적 있다. 숨 막히게 짧은 목줄 좀 늘려주면 안 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런가.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돼지새끼는 돼지새끼답게. 쥐새끼는 쥐새끼답게. 쥐며느리새끼는, 개미새끼는, 귀뚜라미새끼는, 바퀴벌레새끼는, 각자 그 새끼들답게. 그러면, 물고기새끼도 물고기새끼답게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꿰어져 버둥거리면서, 함박웃음 는 ‘사람새끼’에게 배가 갈리면 되는 것인가. 그이에게 물을 걸 그랬다. 그렇군요.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살면 되는 거군요. 그럼, 사람새끼는 어떻게 살아야 사람새끼답게 사는 걸까요?


사람새끼는 사람새끼답게 살면 되는데, 사람새끼답게 사는 건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문득, 다시, 커다란 끈끈이에 모로 누운 채 달라붙어 버린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생은 대체로, 밥을 법 삼아, 살아내는 데, 생존해 내는 데 할애된 생이었는데, 그걸로 치자면, 추위를 피한답시고 어리숙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온, 그리하여 끝내 끈끈이에 잡혀버린 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인간은 자기 생을 치장하고 미화하기를 좋아한다. 인간이라서, 다른 모든 존재와 다르다는 듯. 그런 까닭에, 내게 단호히 종의 계급성을 설파한 누구처럼, 개새끼가 생존을 위해 먹는 밥과 사람새끼가 생존을 위해 먹는 밥은 다르다고 여기는 게다. 그런가.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나 역시, 살아내기 위해, 어리숙하게, 끈끈이에 달라붙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살아온 존재다. 아마도 나는, 아니 분명, 이 참혹한 생의 끈끈이에 달라붙어 살다가, 어느 날인가 의미 없이 무화될 게다.


쥐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미안해.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숙한 너를, 산 채로 죽였어. 내가 그랬어. 미안해. 산 채로 죽어가던 네 몸짓이 떠오를 때마다, 산 채로 죽어가는 숱한 존재들을 떠올리게 돼. 아니야, 거짓말이야. 실은, 산 채로 죽어가는, 죽은 채로 사는, 어리숙한 짐승 같은, 내가 떠올랐어. 거기, 그 끈끈이에 나도 달라붙어 있었거든. 어쨌든 미안해. 네겐 아무 잘못이 없어. 실은, 쥐며느리에게도, 그리마에게도, 바퀴벌레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 그들을 구성했던 원자들에게 물어야 할까? 왜 쥐며느리가, 그리마가, 바퀴벌레가, 쥐가, 개가, 돼지가, 소가, 그리고, 사람이 되었느냐고. 왜 너는 내가 아니고 너이냐고, 물어야 할까? 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이냐고, 물어야 할까?


벌레들을, 곤충들을 무서워했어. 나는 벌레가, 곤충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실은, 내가, 가끔은, 말하는 벌레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쥐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하고 싶어져. 실은, 나도, 그레고르 잠자처럼 변해간다고 털어놓고 싶어져. 고작 쥐 하나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무서워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던 건지도 몰라. 이렇게 존재하는 내가 몸서리쳐지도록 참혹하게 느껴졌던 건지도 몰라. 나는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쁜 꿈이 나를 꾸고 있는 걸까.

이전 17화 욕망의 임계점 앞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