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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an 13. 2024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돈에 주눅든 영혼이여, 자본의 손에 죽어가는 존재여,

몇 달에 한 번씩 들러 빵이며 우유며 간단한 먹거리 서너 가지를 사 가곤 하는, 옆마을 노인은, 물건값을 치른 후 무슨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매번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배가 몇 척 있는데, 올해도 도루묵으로만 수천 만 원을 벌었어. 모아놓은 돈만 수억이고, 건물도 하나 있지. 애들 다 고등교육시켜서 시집장가보냈고. 돈을 더 벌 필요는 없는데, 배를 그냥 놀리기 뭐하니까 일하는 거야.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도 더 아파. 아무튼, 돈이 최고야, 돈이. 좋은 학교 나왔다 뭐다 다 필요 없어. 돈만 있으면 돼.”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서,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으면 좀 지루해지기는 하는데, 그래도 최대한 성심성의껏 들어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이가 오랜 세월 돈이 없어서, 돈이 부족해서 겪은 설움이 얼마나 가슴 깊이 박혀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게다가 그이가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내게 늘어놓는 것은 분명 내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이 속한 이 건물 때문이리라 짐작됐다. 공무원들이 청정한 바닷가 모래사장 옆에 왜 이렇듯 거대한 호텔 건축을 허가했는지는 어렵잖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뭐든 간에, 이곳 어촌 마을 주민들에게는 생경함을 넘어, 아니꼽고 배알이 뒤틀리는 침략처럼 느껴졌을 테고, 실제로 호텔과 호텔을 둘러싼 자본의 습격에 한동안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커다란 건물은, 돈이자 자본이고, 이 구조물에 속해 일하는 나는 자본의 일부다. 그러니, 그이는, 사실상 내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니라, 이 건물과, 건물을 만들어낸 자본에게 뇌까리고 있는 거였다. “너희들만 돈 있는 줄 알어? 나도 남 부럽지 않을 만큼 갖고 있어. 그러니까, 우습게 볼 생각 말어. 알겠어?”


나는 건물의 대변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이가 마음의 평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성을 내지른 스스로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게 하고 싶어, 경의와 찬탄의 인사를 건넸다.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래요, 어르신. 가만히 쉬어봐야 몸이 더 굳고 힘들죠. 그냥 소일거리 삼아 일하시면 되겠어요. 배를 남한테 맡겨놓는 것도 안심이 안 되잖아요. 그, 갖고 계시다는 건물 있는 동네, 부동산 값이 엄청 올랐다던데, 아무튼 좋으시겠어요!” 우쭐해진 그이는, 그제야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가게 문을 나섰다. 올해 도루묵이 많지 않아 수익이 별로였다는, 동네 어촌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미 들은 터였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던 시절, 나는 편집자나 북에디터라는 말 따위보다, 언제나 ‘출판노동자’라는 말로 직업정체성을 규정하기를 더 선호했다. 제 힘으로 땀 흘려 수고함으로써 밥을 버는 ‘노동자’라는 개념이, 일하며 사는 내게 가장 부합하는 정체성이었고, 나는 노동자로서 밥을 벌고, 노동자로서 일하는 데 모종의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고, 비록 만족할 만한 벌이는 아니지만, 제 노동을 팔아 많지 않은 돈을 얻는 데 자괴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게 잘못되었던 거다. 나는, 자본 앞에 선 노동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아야 했고, 그걸 모르는, 아니 그걸 신경 쓰지 않는 정신과 태도로 인해, 아비에게조차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마흔을 넘어섰을 무렵, 아직도 셋집에 사는 게 무슨 자랑이냐고 호통을 쳤는데, 그건 자신에게 그럴듯한 자식으로서 성인이 되지 못한 나에 대한, 그럴듯한 자식이 되어 만족할 만한 보답을 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불만, 그리고 자식을 그런 어른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뒤섞인 울부짖음 같은 거였다.


며칠 전, 정오를 조금 지났을 무렵, 보라색 코트를 입은, 귀며 목이며 손가락에 치렁치렁 귀금속을 단, 여인이 들어섰다. 뒤이어, 키가 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따라 들어섰는데, 그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저 호텔하고 이 호텔이 같은 거요?” 딱히 무례한 말인 건 아닌데, 왠지 거슬리는 말투였다. 그이에게 뭐라 답하려던 중, 동행인 보라색 코트 여인이 골라 온 물건을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인 채 제 손지갑을 뒤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봉투 하나 줘봐.” 이 역시 딱히 무례하진 않지만 듣기 싫은 말투여서, 나는 내심, 둘이 참 닮았다 생각했다. 계산을 끝낸 ‘환상의 짝꿍’이 가게를 나설 때,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수고해요.”


어마어마한 편견이겠지만, 나는 그이들이, 제 노동으로, 제 땀으로 밥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돈을 번, 이 건물과 자기정체성이 비슷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다. 허나, 사고를 좀 더 이어가다 보니, 그이들도 언젠가 돈이 없어, 돈이 부족해 설움을 당한 건 아닐까, 돈으로 돈을 벌었든, 다른 무엇으로 돈을 벌었든, 어쨌든 이제는 벌 만큼 벌어, 어깨에 힘 좀 주며 뻐기고 싶은, 졸부, 아니 자본의 자식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수억 재산에 배 수 척과 건물까지 소유하고 있지만 소일거리로 배를 타는 노인과, 우아한 코트와 정장을 입은 채 이 지역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 묵으며 딱히 무례하진 않지만 거슬리게 말하는 환상의 짝꿍을 만나고 난 뒤, 난, 돈에게 이렇게 따져 묻고 싶어졌다. “너 대체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자 돈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답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저 태어났을 뿐이야. 그러자 인간들이 곧바로 나를 숭배하기 시작하더라고.”


우리는 땀 흘려 수고하는 노동에, 제 땀으로 밥을 버는 일에 값을 매기는데, 그 값이라는 것이 실제 땀이나 수고로움에 값하는 것은 아닌데도, 돈을 우러러보는 시대다 보니, 간혹 사람들은, 적은 값의 노동을 헐값의 삶과 연결 짓곤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구든, 노동 그 자체의 수고로움보다, 노동 그 자체의 특별함보다, 노동의 값이 얼마인지를 과시하는 데 혈안이 되곤 한다. 더욱이, 이제는, 제 땀으로, 제 땀만큼 밥을 버는 일은 하찮은 데다가 기피해야 할 일로 여겨지고, 가능한 한 땀을 덜 흘리며 최대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그리하여 푼돈을 넘어 자본의 영역에 입성하는 것이 ‘잘 사는 삶’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지구상 어느 한구석에서는 누군가 굶어 죽어도, 배가 찢어질 만큼 입 안으로 음식을 구겨 넣는 일이 ‘크리에이터’로 칭송받고, 그런 일로 많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누구나, 실은 가치 있는 그 무엇도 창출해내지 못하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어 한다.


‘요즘 젊은 애들은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해. 편하게 자라서 그렇지. 걔들이 뭐 힘든 일을 겪어보기나 했겠어?’ 그런가?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척도를 특정 시대, 특정 지역, 특정 상황에 두고, 그러니까 순전히 좁디좁은 주관적 영역에 기준점을 잡고 다른 모든 삶과 시대를 논하려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처구니없는, 판단 오류지만, 설령 오류를 무시한 채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제 땀으로, 제 땀만큼, 힘들여 밥을 벌고 살아도 되는 세상, 그것으로도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그것으로도 삶을 살아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세상인가.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이, 제 땀으로, 제 땀만큼 힘들여 사는 것이 더 값있는 삶이라고 말해주는, 그런 가치에 동의해 주는 세상인가. 그리하여,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공돈을 버는 일보다, 주식매매로 돈을 뻥튀기하는 것보다, 시답잖은 행위로 돈을 버는 속칭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보다, 땀 흘려 밥을 버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세상인가. 만약,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누구나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이 세상을 누가 만들어왔는지 되물어야 할 게다. 이게 다 돈 때문이라고? 아니다. 돈에게 물으니, 그가 분명히 답했다는 걸, 이미 밝히지 않았는가. 그저, 인간들이, 스스로, 돈을 숭배했을 뿐이라고. 돈 때문에 당한 설움을 핑계 삼고 싶은가. 돈으로 설움을 이겨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돈으로 힘을 누리고, 돈으로 계급을 사고 싶었던 건 아닌가.


살다 보니,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제 삶의 성과를 수치화해 알려주곤 한다. 내가 물은 적 있던가,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난, 상대의 삶의 현재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잘 던지는 편이지만, 그 문제만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딱 그 부분을 발설하고 싶어 하고, 특히, 스스로 그 수치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은 강해진다. 대개 칭송과 감탄의 피드백을 기대하기에, 그런 대화, 라기보다 말 섞음은 쉽사리 피로로 이어진다.


돈의 광신도로 사는 시대를, 삐딱하게, 고개를 외로 꼰 채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돈에 주눅든 생에게 주눅들지 말라, 힘내라, 말하지 못하겠다. 실은, 돈에 주눅들어 강제이주한 나이기에, 그걸 짐짓, 귀농과 귀촌이란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한 나이기에, 그들에게, 괜찮다, 이겨낼 수 있다, 기회가 올 것이다, 허튼소리를 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들이, 그래도,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살아냈으면 하는 것이다. 돈의 광신도들이 지배하는 자본의 왕국이, 널브러진 시체들을 밟고 올라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끈질기게,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자연의 부름에 따라 무화될 때까지, 우주의 원자로 돌아갈 때까지. 모두가, 조화롭고 평등한 질서로, 무질서로, 돌아갈 때까지.




* 에세이 주제목: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_ 기형도, <비가2-붉은 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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