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미 Jun 26. 2023

4. 간장게장을 먹으러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수영장 대신 병원 앞 헬스장에 등록했다. 혜정 언니를 처음 만난 곳은 헬스장이었다. 언니는 다정하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봐 주고 운동 기구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언니에게 가끔 서러운 직장 생활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정 많고 사람 좋은 언니는 항상 내 편이 되어주었다. 언니의 다정함은 한도 초과였다.      


어느 날부턴가 언니는 남자를 소개해 준다며 안달했다. 당진에서의 생활이 무료하고 외로운 건 사실이지만 애인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재차 거절하자 병원에서 주는 맛없는 밥 때문에 맘 상한 걸 아는 언니는 먹을 것으로 나를 꼬드겼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거듭된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라곤 병원 직원들뿐인데 아무도 내 밥에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은 숙식 제공을 했지만, 근무가 끝나기 전 급식도 종료되어 눈앞에서 식당 문이 꽝 닫혔다. 이런 무자비한 경우가 다 있나.    

 

하루에 점심 한 끼 겨우 먹는데 윤기 없는 밥에 물에 빤 듯 허연 김치 몇 조각 짠지 몇 가닥이 반찬 전부였다. 오징어나 배추 몇 가닥이 둥둥 뜬 멀건 국은 간마저 맞지 않았다. 흔한 조미김이나 달걀부침 하나를 내어 주지 않았다. 빡빡하게 끓인 된장이나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돈이 귀한 집에 살았어도 우리 집에선 조미김에 생선 한 도막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었는데 밥상을 대할 때마다 기가 막혔다. 따뜻한 밥이라도 제대로 된 반찬과 먹고 싶었다. 어디 가서 빌어먹어도 이보다 나을 것 같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했건만 무슨 거지도 이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어쩌면 이리 양심 없이 직원을 천대하는지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그냥 맛있는 거 얻어먹고 오자”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많이 계산하던 때였고 혜정 언니 말대로 가볍게 만나 밥이나 얻어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얄팍한 심산이었다. 밥 때문에 남편을 만났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 먹은 건 광어회였다. 언니는 내 등을 떠밀어 횟집에 앉혔다. 후에 언니는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우리가 이렇게 잘 될 줄 모르고 회 한사라에 소주 한잔 먹고 싶었다고 했다. 소개팅에 대한 시큰둥한 반응을 보고 어린 내 나이, 무엇보다 8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무리수라 생각하고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명태, 오징어, 도루묵, 양미리, 가자미, 임연수

푸른 파도가 흰 모래사장에 쓰러지는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서 주로 먹는 수산물이다. 북쪽에서 한류가 내려와 동해 앞바다에서 난류와 만나 이루는 어장, 시원한 물 좋아하는 물고기들이 잡힌다. 서해엔 갯벌이 있고 바지락과 낙지. 꽃게 같은 것들이 잡힌다더니 밥상 위에서 산 낙지가 꼼지락거렸다. 처음 보는 식탁 풍경이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진: Unsplash의Matheus Ferrero

“오늘 집에 일찍 갈까?”

이 소리는 당진에 산다는 운동 마니아 남편이 아내 눈치를 살피는 소리다. 자상한 남편이 퇴근 전 일찍 오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운동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남편은 매일 2시간 이상 운동을 한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그는 약속 자리에 친구를 한 명 이상 데리고 나왔다. 남자들이 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축구를 하던 때라 땀에 젖은 남자들이 회식하는 자리에 종종 불려갔다. 덕분에 땀 냄새, 발 냄새를 덧입힌 식탁을 받기도 했다. 남편은 애인을 만나도 운동은 놓칠 수 없었고, 친구들은 혼기 꽉 찬 모태솔로 남편이 근래 만난다는 나이 어린 여자 친구 얼굴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퇴근 무렵, 병원 앞에서 기다리던 그를 따라 ‘OO 식당’이라 쓰인 간판 아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역시나 그날도 이전에 본 적 없는 남정네들 한 무리가 앉아 있었다. 간장게장? 간장게장이 어떤 음식이지? 모험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특히 음식에 그렇다. 된장찌개나 먹을 생각인데 커다란 접시에 알이 꽉 찬 꽃게가 기름을 바른 듯 윤 나는 진줏빛 속살을 드러내고 누워있었다. 언제 내가 된장찌개에 김치를 먹겠다고 했단 말인가, 맛보고 싶은 욕구가 활활 타올랐다.   

   

사진: Unsplash의Beth Macdonald

웃을 때 손으로 입 가리고 귀 뒤로 긴 머리 살짝 넘겨 꽂으며 입도 작게 벌리고 먹을 때지만 입 쫙쫙 벌리고 딱딱한 게 다리도 씹어 뱉어가며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비릿한 그 맛에 스며들었다. 과연 밥도둑이었다.

    

 ‘오늘부터 1일’ 사귄 날짜를 계산하는 세대는 아니었으니 애인으로 출발할 건지, 아는 사람으로 만날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만나다 보면 애인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다 싶으면 마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혼자 먹는 것도 싫었거니와 그와 데이트 하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무엇보다 정말 원 없이 맛있는 밥을 배불리 먹고 또 먹었다.  

    

그는 모쏠이라기엔 치밀한 계획하에 움직이는 능구렁이가 분명했다. 자꾸만 친구들을 소개해 줬다. “아는 형수가 저녁 먹으러 오라는데 같이 갔으면 좋겠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릴 때도 밥에 정신이 팔려 눈치도 못 채고 좋다고 따라갔다.     

 

무슨 회식 자리도 아니고 시커먼 남자들이 열댓 명이 방에 앉아 있는데 가운데 잔칫상도 아니고 음식은 또 왜 그리 많이 차렸는지. (주의 사항. 절대로 집들이가 아니다. 나를 맞기 위한 상이다) 갈비, 잡채, 각종 무침 요리에 회와 매운탕까지 없는 게 없었다. 센터엔 맛난 간장게장도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나고서야 알았다. 순진한 남편이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덫을 놓았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걸려들고 말았다.  

    


밥알이 내 안에 쌓일 때는 몰랐다. 그가 사주는 밥, 친구들이 사는 밥, 회사 사원 아파트에서 가족처럼 지낸다는 그의 형수님들이 차려준 따끈한 쌀밥에 반쯤 몸을 담그고 헤프게 퍼먹을 때는 몰랐다. 밥알이 옆구리에서 지방이 되어 터져 나올 때쯤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두 볼에 밥알 가득 물고 눈을 끔뻑거리다 정신이 들었을 땐 되돌리기엔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갓 잡은 생선처럼 파닥거리는 내게 파고드는 그의 끈기는 서울 종로 보신각 타종 소리 마냥 귓가에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끝내 당진을 벗어나지 못했고, 촌티 나는 아저씨한테 굴비 엮이듯 엮여 버렸다.      

간장게장을 먹으러 가는 게 아니었다.

이전 03화 3. 아름다운 시절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