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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Jun 12. 2023

2. 어른이 되어 가는 중입니다

“김 선생, 8시에 치료실 문 좀 열어줘. 시골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첫차 타고 일찍 오셔”     

 

병원 별관 2층 2호실은 내 방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2층 난간 아래로 환자들이 병원 입구에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별관 건물은 근대식 가옥 구조의 오래된 병원 건물 옆구리를 바라보며 일자도 아닌 것이 사선도 아닌 채 엉성하게 세워져 있고 복도에 창이 없어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아침 7시가 좀 넘은 시간 방문을 열고 나가자 물리치료실 문 앞에 환자 대여섯 분이 대기하는 진풍경을 첫날부터 내리 목격하곤 했다.  

  

접수하는 일, 환자 상대하는 일, 치료기기 다루는 일, 치료용품의 위치 파악 등 치료실 루틴에 미숙해 정신이 없는데,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환자의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서툰 초보는 기진할 것 같았다. 다리 힘이 풀리고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다. 근무가 끝나면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픽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지, 빨리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공용주차장이 된 병원이 있던 터, 정면에 보이는 나무 아래에 병원 별관이 있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바빴고, 20개의 침상이 가득 차고도 남도록 환자가 많았다. 중앙 대기실 의자에도 10여 명 가까운 환자들이 치료 대기 중인데, 한 사람이 나가면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미 몸은 지쳐 걸음은 느려지고 영혼도 알곡 털리듯 탈탈 털렸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후다닥’ 치료실 뒷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봇물 터지듯 눈물이 흐르는데 멈출 방법은 모르겠고, 꺼이꺼이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왔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고, 엎드려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내 방이 치료실 바로 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고, 무엇도 내 의식을 깨우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얼굴이 온통 눈물, 콧물로 범벅인데. 환자 치료가 밀려 정신없이 바빴던 동료가 방문을 두드렸다.  ‘다시 일하러 가야 하는구나. 내 인생에 땡땡이는 이제 없다.’   

  



나는 부모의 잦은 다툼과 폭력, 학대당하는 오빠를 보고 자랐다. 오 남매 중 막내지만 부모의 관심 어린 눈빛과 보살핌을 기대하지 못했고, 웅크리고 없는 듯 살았다. 위로 언니, 오빠와도 나이 터울이 꽤 있어 기억하는 많은 순간이 혼자였다. 외롭게 컸다. 막내 특유의 애교와 의존성, 활발함 때문에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어두운 구석이 있어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했다. 잔소리 듣기 싫어서 억지로 했기에 모르는 게 많고 제대로 배운 건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자유로워지자 어릴 때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나가던 교회에 가지 않았고 ‘뻑’하면 수업을 찢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거리를 쏘다니며 생각 없이 살았다.  

    

엄마들은 사춘기 딸에게 흔히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하신다. 우리 엄마도 말대답이 많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악담 중 하나다. 처음 엄마가 내게 이 말을 했을 때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그대로 멈췄다.   

   

돌아보니 그 말은 단지 못된 기질에 아이가 있으면 힘들어서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입장이 있고 그 입장에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삶으로 살아내고 마음이 닿지 않으면 결코 모르는 것들이 있다. ‘어린 네가 뭘 알아서 그렇게 바득바득 대드냐? 너도 내 입장 돼봐 넌 뭐 다를 줄 아니?’ 정도의 의미지 싶다. 

     

사진: Unsplash의 Sasha  Freemind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던 그 순간을 지나며 깨달았다. 핑계야 많지만, 그동안 사는 대로 생각했다는 것을. 직장을 얻고, 일정한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바치며 살아 보고 알았다. 산다는 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어려운 걸 평생 한 거야?’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댈 곳도 없이 자식 다섯을 키우며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하는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엄마는 배운 것도 많지 않고, 벌이도 박했는데 어린 자식을 남편의 도움 없이 홀로 책임졌으니, 어쩔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내게 쏟아졌던 거구나 싶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건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어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으리라. 맹하고 철없는 아이로 계속 머물 수 없고, 삶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진하게 느껴버린 탓이다. 평생 일하며 자신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을 경험으로 무겁게 깨달은 것이 확실했다.   

   

누구나 살면서 알맞은 시간에 이르고 성장의 순간은 여러 번에 걸쳐 온다. 그곳의 환경은 이전과는 다르고 마냥 꽃길은 아니어서 혼란스럽지만, 점차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 또한 곧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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