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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Jun 07. 2023

1. 당진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97년.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신청하느니 마느니 하는 위기 상황이었고 내 삶도 위기였다. 나는 때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거리를 배회하다 쌍권총이 어울리는 황야의 무법자가 되었다. 학과장님의 염려와 진심 어린 조언을 듣기가 일쑤였고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국가고시에 낙방했다.


같은 학번의 친구들은 졸업 후 취업을 했겠지만 (그랬는지 어쨌는지 관심 없었다) 자괴감에 짓눌린 나는 눈을 꼭 감고 평상심을 유지하기도 버거운 나날을 보냈다. 동기들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학교 앞 자취방에 머물며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1998년 겨울 물리치료사 면허시험에 합격했고, 몇 달째 이어온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2주쯤 지났을까 나와 함께 좌청룡, 우백호로 마지막까지 학교 도서관을 지켰던 친구 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취업은 했어?”

"아니. 해야지"

"너는?"

당진에 있어.”

“당진?”    

한보 철강 당진 제철소 모습 <머니 그라운드>

당진은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보철강 당진사업소가 있는 동네로 내가 처음 당진에 온 1999년도에 한보는 법정관리 상태에 있었다. 한보그룹 (고) 정태수 회장은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라는 역술가의 말을 듣고 철강사업에 발을 디뎠으나 1997년 1월 23일 최종부도처리 되었기 때문이었다.


뉴스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던 기사가 생각나며 당진이 낯설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오랜만에 여행하듯 외딴 동네에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취업보다는 친구를 만나겠다는 마음이 컸다.   

  

초여름. 언니가 사준 신상 정장을 빼입고 당진에 왔다. 약 기운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로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치익’ 버스 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뜨면 아산. 또 한 번의 문 열리는 소리에 눈뜨면 합덕, 신례원, 삽교천 그리고 기지시리를 지나는 버스의 종점이 당진이었다. 두 번은 못 오겠다 싶었다. 최악이었다.     


지금은 자가 운전자라 버스를 이용할 일이 없고 노선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강릉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면 여기저기 돌고 돌아가는 완행버스가 대부분이었고, 어쩌다 직행이 있어도 당진에서 강릉은 멀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이니까.    

  

당진에 오고 얼마 동안은 서울을 거점 삼아 다녔다. 그러다 얼마 후에 당진 강릉 간 버스는 하루 한 대, 큰언니가 사는 원주까지는 하루 두 대의 버스 노선이 생겼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래도 그때는 당진에서 강릉에 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진에 오고 이듬해인 2000년 11월. 7년의 공사 끝에 서해안 고속도로가 완공되었고, 고향에 가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운전대를 유연하게 한 손 핸들링하며 뒤를 보는 주차의 달인(?)도 되었으니 길이 나고 도로가 생긴 이 모든 상황은 나를 위한 것일 것인가? 하하하~       

 

서해안 고속도로

  

터미널을 당진 사람들은 ‘차 부’라 불렀는데, 내 보기에 ‘여기가 터미널이라고?’ 싶을 정도로 작고 허름했다. 마치 시골 장터 옆 길가에 선 것 같은 분위기. 버스에서 내리자 롯데리아가 보였고 매표소 건물 안쪽은 어둡고 음습하니 버스 매연과 먼지에 찌들었는지 불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 시골이다. 작은 도시네.’ 대도시에 살고 싶었던 나는 실망이 컸다. ‘면접을 본다고 다 합격하는 것도 아니고 뭐 일단, 친구나 만나고 가자’    

  

이혼 후 다섯 남매를 혼자 키운 엄마는 큰언니와 살림을 합쳤고, 나는 독립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살고 싶었던 나는 서울에서도 같은 날 한 곳에서 면접을 봤지만, 급여가 적고 기숙사 제공을 안 했다. 서울과 당진 모두 딱히 연고가 없는 상황에서 기숙사 제공이 안 되는 서울보다는 당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강릉을 벗어나 선택한 곳이 당진이라니. 그래도 근처 병원에 친구라도 있으니 위로가 됐다. 그랬는데, 그래서 왔는데....  미라는 나를 여기 꽂아 놓고 한 달도 채 안 되어 강릉으로 내뺐다.      


친구는 비록 떠났지만 취업하고 보니 앞으로 딱 2년만 여기서 근무하자 결심이 섰다. 경력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컸다.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고 친구는 사귀면 된다는 막연한 긍정도 한몫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활하고 돈을 모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견디자 마음먹었다.  

    

주먹구구식 계획은 그런대로 거창해 보였고 젊음의 패기는 모든 것을 긍정으로 바라보게 했기에 괜찮았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당진과 인연을 맺었고, 지금까지 24년째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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