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방법
신문기사를 보면 자살 유가족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인다.
나는 단 한 번도 나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다.
물론, 남들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내가 자살 유가족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이 단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싫다.
무언가로 나를 낙인찍히는 것만 같다.
내가 브런치의 소제목을 '이 세상에 남겨진 자의 이야기'라고 지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자살 유가족들은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일에 더해 알 수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산다. 특히 기사로 자살 소식을 접할 때마다 회복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느낌이 든다.
나 역시도 이런 일이 있은 후
심리상담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상담사 분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 중 하나는
"절대 수치심을 가질 필요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말은
"자살도 이 세상에 많은 죽음 중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생각보다 사람이 죽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우리는 보통 막연히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이 나이가 들어 병이 들어 자연스럽게 죽는 모습을 대부분 생각한다.
하지만 통계에 따르면 익사, 운수사고, 화재사고, 중동사고, 모성사망, 타살 등 사람들이 죽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아마도 부검을 담당하는 법의학자라면 이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는데, 나는 자살 유가족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에게 붙이기보다 인생에 고통의 총량이 있다면 단지 조금 더 일찍 고통을 겪은 사람일 뿐이다. 그 슬픔과 아픔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기에 그 어떤 고통보다 크거나 작음을 객관적으로 논할 순 없지만 나로부터 그러한 꼬리표를 떼고 단지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과 성장을 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본다면, 나를 어떠한 단어로 규정하기보다 이 일로 인해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가치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지 않을까?
미움받는 용기라는 책 37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 즉 트라우마 - 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수치심과 죄책감, 또는 그 어떠한 부정적인 단어로도 옭아매지 말자. 영화 <미나리>로 한국 여배우 최초로 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 배우가, 불행했던 미국 결혼 생활 중 터득한 영어로 먼 훗날 멋지게 수상 소감을 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비극적인 일은 이미 일어났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언니는 조상의 죄를 대신 치른 것일까? 이유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단지 인생의 무작위적인 장난에 (불운에) 의해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시련과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선물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자. 정말로 우리가 겪은 고통은 훗날 어떠한 희락의 터전이 되어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