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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 Dec 03. 2024

UNISEX

 유럽에 40일간 머물면서 500만 원이란 금액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여유로운 돈은 아니었다. 호텔보단 게스트하우스에 지낼 때가 많았는데 처음엔 어리바리 그 자체였다. 외국은 남녀 분리보다 혼성 게스트하우스가 많았다. 이미 출국 전에 많이 알아봤지만, 막상 숙소에 도착하니 혼자 눈치 보기 바빴다. 8인실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남자는 웃통을 벗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여자들도 신경 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대충 눈인사만 나누고 내 자리로 가서 유심을 갈아 끼우기 바빴다. 아무리 설정해도 제대로 되지 않아 난감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한 명 두 명 모이더니 나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타국에서 낯선 이와 이렇게 웃고 있으니 긴장이 풀렸다. 출국 전 나는 뭘 상상하고 뭘 오해를 하며 혼자 긴장했는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남녀가 여럿이서 한 방에 같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고 스스로 편견을 만들었다. 그저 여행지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인데 음란마귀가 끼고 이상한 건 나였던 거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건데 숨어서 갈아입으며 부끄럽다고 느끼는 것이 오히려 스스로 죄를 늘려가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운 것이 죄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럼 부끄러운 걸 잠시 내려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눈치를 보지 않고 숙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 인사를 나눴다. 내가 이렇게까지 사소한 것에도 평소 남을 의식을 많이 한 건가 싶었다. 나에게 집중하니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고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이제 벽 하나를 깬 거였다.


 이후 자원봉사 기관에 도착한 나의 숙소는 광활한 잔디밭 위 작은 텐트였다. 씻는 것은 건물 안으로 가면 샤워실이 있었다. 샤워실은 3개로 나뉘었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글자가 하나 있었다. 'MAN', 'WOMAN', 'UNISEX'.

 'UNISEX, 혼성이라... 혼성 샤워실은 뭐지? 다 같이 들어가서 씻는 건가?'


 또다시 시작되는 나의 상상력. 내가 보수적인 건지 여기가 너무 개방적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호기심은 결국 그 손잡이를 열었고 혼란은 사라졌다. 혼성 샤워실 문을 여니 그곳에는 화장실 칸막이처럼 각각 4면이 다 막혀있고 그 안에서 각자 씻고 나오는 것이다. 결론은 나의 상상력이 몹쓸 음란마귀가 씌웠던 걸로 끝이 났다.


 나는 여행할 때 작은 소신이 있다면 그것은 그곳에서는 나의 방식을 내려놓고 현지인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맛집을 찾기보다 골목을 들어가 아무 식당에 들어가고, 관광지는 꼭 가고 싶었던 곳만 가고 빼곡한 관광일정을 따라가진 않지만, 특유 문화가 있다면 경험하려 한다. 처음엔 '나'를 내려놓기가 어색하고 부끄러웠는데 점점 스스로 틀을 깨니 오히려 진짜 '나'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더 큰 내가 될 수 있었지만 언제나 한계를 만들고 정해둔 틀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인생을 배우다 보면 내 안에 다른 나를 자꾸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서 여행을 멈출 수가 없다. 여행지보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다음 여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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