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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포포 Oct 24. 2021

가끔은 내가 다시 좋아졌다

워라밸이 있다면 매라벨도 (Marriage life balance)

그러나 자신이 소수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졌을 때 소신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다수 의견에 대치되는 소수 의견을 솔직히 말했다가는 소통하거나 설득하기는커녕 견디기 힘든 다수의 비난이나 비판을 마주하게 되니까. (중략) 솔직해짐으로써 타인의 비난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면서 스스로를 미워할 것인가. 가급적이면 전자였으면 좋겠다. 독립된 개개인이 솔직해질 수 있는 힘을 가지기를 바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들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심플하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p22, 23, 「자유로울 것」, 임경선, 위즈덤하우스 2017




나는 한동안 많이 아팠다. 그것은 소위 '산후 우울증'이라는 이름이 붙어져 호르몬의 이상 작용 때문에, 집 안에서 아이랑 둘이 있어야 하는 육아의 외로움 때문에 라는 쉬운 이유가 덧대어졌다. 모두가 잠들고 홀로 남아도 잠들고 싶지 않았고, 아침이면 눈뜨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기대도 없는 내일과, 1년과, 10년이 같은 형태로 무한 회귀하는 이 삶에서 조용히 죽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죽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런 죽음은 없었다. 나란 실존에 엮여있는 모든 것에 상관이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한 삶의 방식을 너무도 늦게 알아차렸다. 그러한 단죄가 마치 남은 생에 내려진 듯 일상 앞에선 나는 매번 좌절스러웠다.


결혼 후 시댁 식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일주일은 우울했다. 나에 대한 모든 평가는 아이로 시작해 아이가 얼마나 나이에 맞게 잘 크고 있는지, 체중이 늘고 있는지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이제껏 공부와 실력으로 누군가에게 뒤쳐진다는 느낌 없이 살아온 나에게 이 척도는 너무도 자의적이었으며, 살아있는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그만한 변수와 아이가 가진 기질과 특성등 많은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둘째 아이에게 끈질기게 나타나는 아토피는 우리 집에 커다란 그늘이 되어 나와 아이를 잠식해갔다.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길 가다 마주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꼭 우리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비법과 조언을 던지고 가는 사람들에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벅벅 긁는 아이를 보면 절망스러웠고, 대체로 이렇게 아이를 낳은 내가 싫었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멈추게 된 것은 나와 아이가 분리되면서였다. 아이=나. 라는 공식에서부터 벗어나면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오래 시간 연락 없이 멀어진 인연의 끈을 다시금 잇고, 간간히 홀로 나가 어두운 영화관에서 나 자신을 찾았다. 


아이들이 모두 떠난 오전 시간, 독립서점에 모여서 책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아이도 엄마라는 굴레도 모두 내려놓고 비로소 나다워질 수 있었다. 거기서는 오롯이 내 목소리로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일상의 무덤 속에 유배되었던 나를 끄집어내는 시간이었다.


또는 남편의 긴 출장 후 보상처럼 주어지는 1박 2일의 외출은 내게 생명수 같았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었다. 이렇게 나와 있으면 아이들 걱정되지 않아요? 전혀. 아이는 이제 내 자리를 대신할 양육자만 있으면 그 나름대로 시간을 보낼 줄 알았고, 나 역시 절대적인 아이의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집을 나와 있는 동안은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했다. 내가 누굴 보고 싶어 하는지, 무얼 먹고 싶은지, 언제 자고 싶은지, 그 안에서 다른 이가 비집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내가 엄마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내가 가장, 먼저, 소중했다. 2-3일이 주어진 자유 시간에는 나는 훌쩍 이 도시를 떠나 타지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들은 오래전에 내게 무척 소중한 이들이었기에 그 여정 자체가 설렘이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기대감에 삶이 좋아지는 순간들이었다. 이동하며 읽는 책들, 친구를 만나 나누는 타임라인이 상관없는 산발적인 대화들, 그리고 낯선 도시의 서점에서 나누는 짧은 만남들에 그간 종이인형처럼 납작하게 살아온 내게, 숨결이 불어넣어지는 듯했다. 나는 만나는 이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같이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넌 항상 반짝이는 눈으로 긍정의 언어들을 전하고 가지.라는 친구의 굿바이 메시지에서 나는 메말랐던 마음이 촉촉하게 적셔짐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읽기와 쓰기. 독립영화. 혼자 보내는 시간. 내 맞은편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자. 그녀와의 티타임, 무화과 타르트 같은 이미지는 오래도록 내게 근원적인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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