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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포포 Oct 24. 2021

결혼과 이중성

에밀리, 우리의 페미니스트 양육 방식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네가 가능한 젠더에 제한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단다. 실제로 젠더를 초월해 성장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늘 젠더를 초월해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을 남자나 여자로 보지 않아요.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며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생각해요. 내 자신에 관해서라면, 겉으로 볼 때는 여자아이처럼 보이겠지만 내면을 본다면 저는 스스로를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 다 가졌지만 어느 것도 특별히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느껴요. 


p294, 295, <나를 지키는 결혼생활>, 샌드라 립시츠 벰, 김영사 2020




내가 기이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종종 있다.

한쪽은 여자, 한쪽은 남자 얼굴을 한 아수라 백작이 한 명 내 안에 존재하는 기분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나의 성향.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 누군가가 기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나를 제외한 모든 여성성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 매너와 리드로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싶은 태도.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처음보는 사람과는 낯을 가리고 어떤 면에서는 내향성인 사람‘이라는 설명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명제이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물학적인 여자이지만, 어떤 여인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남자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고픈 심리적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남편의 도와줄까 라는 말에 때론 자존심이 상하고, 엄마가 ‘여자는’이라는 단어로 문장을 시작할 땐 그 뻔한 클리셰에 진저리가 난다.


차라리 없다면, 죽어 없는 거라면 이런 기분이 들지도 않을 거예요. 있는데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하는 게 어렵습니다. (중략)


있는데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고 하셨죠. 없는데 있는 것처럼 지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p236,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미스터 심플’>, 정용준, 문학동네 2021


정용준 작가가 말한 게 이런 맥락은 아니겠지만, 있는데 없는 것처럼 지내는 게 나을까, 아님 없는데 있는 것처럼 지내는 게 더 나을까. 둘 다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작품의 말미에 두 사람이 나누는 고통의 깊이에 괜히 내 것을 한 번 달아 옆에 대어보고 싶었다.


결혼 전 신혼집에서 사용할 식기들을 사러 간 날이 떠오른다. 엄마가 리스트를 보면서 읊어주는 식기를 순서대로 착착 꺼내어 보여주시던 그릇집 사장님. 두 사람이 쓸 건데 8인상의 식기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에 언짢음이 얼굴에 나타났나보다. 사장님 왈, 아니 주인공이 왜 이렇게 관심이 없냐고. 괜시리 앞에 놓인 곰솥만 뚫어져라 보며 정말 이게 필요할 날이 올까하면서 대답을 미뤘던 내가 있었다. 그 그릇들이 도자기든, 내열유리든 하등 중요하지 않았던, 그것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릇은 그릇이고, 4인 식구에 맞는 국그릇 4개, 밥그릇 4개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그릇을 씻어 넣는건 여자와 남자가 달리 할 일이 아니다. 밥을 먹었으면 먹은 사람이 치우는 것. 그처럼 심플한 것. 결혼이 이렇게 심플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다면 20%에 육박하는 4년미만 부부의 이혼률은 그 절반, 절반의 절반이 되지 않을까. (*참조.2020년 혼인건수는 21만 4천건, 2020년 이혼건수는 10만 7천건, 혼인지속기간 20년 이상의 이혼이 전체 이혼의 37.2%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4년 이하 이혼이 19.8%를 차지했다.(2020년 혼인, 이혼 통계_ 2021.03.18 김수영 인구동향과장)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남자도 좋아한다. 아니 남자를 싫어한다. 남자라는 동반자와 살아가며 종종 남자라는 종을 증오하기도 한다. 이기적이며, 본능적인 그들에게 진저리치며 멀리 도망친다. 필연적으로 종속적인 관계가 되는 이 부부관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다 체념한다. 비정기적으로 만나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의 문을 열고 계속 걸어가 보았다고. 거기가 절벽 끝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나아갈까, 돌아갈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돌아가기를 택했다고. 


멀리 다녀오셨네요. 그럴 때가 있죠. 저도 자주 그런 생각에 빠지곤 해요. 어제도 멀리 여행을 다녀왔죠 라고 덧붙이고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 더없이 괜찮은 날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하나 꼽아볼 것이고, 힘들게 얻어낸 친밀한 관계들에 관해, 두려움을 상대로 한 작은 승리들에 관해, 친구들과 개와 숲과 일에 관해 말할 테지만, 그래도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 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p370, <욕구들>, 캐롤라인 냅, 북하우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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