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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포포 Oct 24. 2021

남편을 견뎌야 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바꿀 수 없는 룸메이트이며 동반자

사귄 지 일주일 뒤에 고래는 나에게 편지를 한 통 줬다. 사실 우리는 사귄 뒤로 거의 아무 말도 안 했다. 사귀는 사람끼리 뭘 해야 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편지를 여(기숙)사로 가져와서 읽어보니 거기엔 성시경의 발라드 가사가 적혀 있었다. 한 번 읽고 서랍에 넣은 뒤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한 번도 겨우 읽은 것이었다. 뭔가가 괴롭게 직감 되었다. 연애란 상대방의 구린 언어를 견디는 일이로구나. 


p141, 「심신 단련」, 이슬아, 헤엄출판사 2019




결혼도 견디는 일이다. 관심도 없는 서로의 관심사를, 귀 기울이고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면서 마주 앉아야 하고. 정적 속에서 저녁을 먹고 싶은데, 8시 뉴스를 1.5배속으로 플레이 시키면서 자리에 앉는 남편 앞에 말없이 수저를 들어야 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에 대한 앞 뒤 부연 설명을 해야하며(우리는 당최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인가. 그와 내가 쌓아온 교양, 대중적 관심, 문화생활에 대해선 하늘과 바다 끝에 닿은 듯 다르다). 화장실 가고 싶은 시간도 참으며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게 얼른 와서 본인이 만든 영상의 오타여부를 봐달라는 부탁 같은 사소하지만 성가신 것들을 마주해야하는. 시댁에 다녀올 때면 하나씩 늘어나는 낡은 박스들, 내겐 그저 치워버리고 싶은 그의 유년의 물건들을 견뎌야 한다. 


함께 산다는 일은 이 얼마나, 견디는 일인가!


이를테면 나는 한순간 욱하는 마음에 도저히 주방을 지키지 못하고, 손에 닿는 대로 나의 물건을 널부러져 있는 가방에 집어넣고 나올 때가 있다. 그냥 나오면 내 행동에 마음 상한 남편이 아이들에게 또 뭐라고 오역하지 몰라서 ‘엄마는 저녁 운동 다녀올게’라고 친절히 스케치북에 잘보이게 적어 현관 중문에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메모를 적는 것은 또 언제 봤는지, 남편은 중문에 붙여 놓은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뜯어 버린다. 문 앞에 서서 큰 아이에게 입모양으로만 전달한다. 마치 고요속의 외침처럼 운.동. 다.녀.올.게. 소리나지 않게 문을 열고 나선다. 뒤통수가 따가울지라도 발걸음은 가볍다.


이렇게 울컥 울컥 참을 수 없는 순간은 꽤 여러 번 온다. 자주 온다.

이때 항상 같이 오는 생각은 내가 결혼을 왜 했을까. 언제까지 서로의 감정노동으로 우리 집 분위기를 고양시켜야 하는 걸까. 나도 집에서는 감정이고 뭐고 다 놓고 편하게 있고 싶다.


남편은 지난 토, 일, 월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작은 아들과 시어머니를 데리고 다녀온 여행이다. 처음 시작은 작은 아들의 내년 1학년 입학 축하라는 명목이었는데, 그 와중에 눈치를 살짝 보더니 효도도 할겸 엄마도 모시고 다녀오는 건 어떻겠냐며, 마침 비행기 자리도 있다고. 때마침 비행기 자리도 비어 있는게 아니고, 처음부터 이 여행, 어른2명에 아이1명으로 생각하고 준비를 했을테니 그러시라 했다. 어머니와 상의는 끝났으면서 넌지시 네가 허락한다면 이라는 명목을 갖다 붙이니 코웃음이 났다. 2년 전, 어머니와 어머니 동생인 이모네부부, 남편, 큰아이가 다섯이서 제주여행을 다녀왔었다. 그때처럼, 작은 아이도 할머니와 함께 좋은 추억을 쌓았으면 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모든 아들을 효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혼에서 내 어머니를 향한 ‘효도’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를 모르겠다. 정말 목 끝까지 올라오는 질문, 그렇게 늘 어머니 걱정이 많이 되고, (혼자 계신) 어머니가 안 됐으면,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왜 결혼을 했느냐고 묻고 싶다.


그 효도에 동원되어야 하는 며느리의 역할은 결코 적응되는 법이 없다. 


전화뿐만이 아니었다. 남편 가족들의 생일과 선물을 챙기는 것도 당연히 나의 일이었다. 내가 안하면 남편도 안했다. 남편은 친정 가족들에게 주기적으로 안부전화를 하지 않아도 아무런 추궁을 받지 않았는데, 왜 나만 이토록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안부전화가 뭐 어렵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권력이 작동하는 일에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한다.


p196,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가연, 민들레, 2019


오전에 전통시장을 다녀오면서 재택 근무하는 남편과 나의 점심거리를 사들고 귀가해 같이 점심을 먹고, 남편은 둘째를 일찍 하원 시켜 자전거를 타러 갔다. 시금치나물을 데쳐놓고, 금일 예약되있는 두 아이 태권도장 상담을 위해 출타했다. 첫째와 도장을 방문하고, 다시 귀가해 자전거 타고 온 둘째를 데리고 유아전문 태권도장을 방문했다. 상담과 등록을 마치고 귀가하니 남편은 아까 나갈 때 모습 그대로 이부자리 위에 꼼짝 앉고 있었다. 제주도를 다녀온 이후 제대로 여독을 풀지 못하고 몇 일째 고단한 모습을 보이니 울컥 화가 올라왔다. 문을 닫아 놓고 밥을 돌려 소고기와 야채를 볶아 유부초밥을 만들어 아이들 저녁으로 주었다. 점심 때 사온 메뉴들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 나니 한바탕한 어지럽혀진 주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차 귀가-태권도상담-2차 귀가-저녁까지 먹고 나서도 조용하던 남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 태권도장은 두 곳은 다 다녀왔냐며. 다음 주부터 두 아이 각자 하교 시간 맞추어 태권도장에 간다고 대답했다. 아이 둘이 유부초밥을 먹고 있는데 별 말이 없다. 내도록 누웠다 일어났으니 배가 안고픈가 싶어 꺼내놓은 식재료들을 하나씩 정리해 넣었다. 남편 말로는 오늘도 작은 아이가 친구에게 나무 블록을 던져서 학교를 나서던 순간까지 선생님에게 주의를 받고 있더라고 전했다. 그와 함께 주방 정리 중인 내게 남편은 내 밥은? 이라고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그러면 아까 저녁 차릴 때 그만 누워있고 나왔어야지. 아니면 아이들 먹고 있을 때 나도 유부초밥 먹을께 라고 언질을 주던가. 지금 뻔히 주방 난장판에 정리하고 있는 거 안보이는 건가? 오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름을 느꼈다. 


말없이 남은 소고기와 야채를 냉장고에서 다시 꺼내 다지고 볶아 유부초밥을 꾸역꾸역 만들었다. 그때 옆에 온 남편은 가스렌지위 냄비를 열어보고선 이거 먹어도 되는데 라고 거든다. 아침부터 욱신거리던 허리가 더 쑤셔오는 기분이다.


흰 접시 한가득 유부초밥을 채워 식탁에 올려 놓으니, 굳이 설거지를 하겠다는 남편을 보고서는, 굳이 이 좁은 1자 부엌에 둘이서 투닥되는 것도 지겨워 그럼 나갔다올게 하고 얼른 집을  나왔다.


복합적으로 짜증이 났다.


제주 여행 3일에, 50만원이면 진짜 많이 안 쓴거다 그치? 라고 묻던 남편의 얼굴을 보며 난 뭐라고 대꾸를 할지 몰랐다. 그러고 남은 주간을 피곤해하며 틈틈이 누워 있곤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아니 놀다왔으면 재충전이 돼서 일과를 보내야지, 돈쓰고 놀고와 끙끙대는 모습을 보니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 여행에, 비용에, 시어머니를 향한 효심지극한 선택에 뭐라고 한 마디 할 수 없는 건 내게 없는 경제력 때문이 아닐까. 내 자존감이 쪼그라드는 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돌봄과 가사노동에 내 20대와 30대를 다 써버리고 남은 게 없어서 일까. 


결혼과 함께 공고해지는 역학관계에 무기력해졌고, 내가 내일 죽어도 그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과 같이 살고 싶지 않아.”


그동안 졸혼, 휴혼, 해혼을 포함해 ‘결혼 이후’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나눠왔지만, 그날의 얘기는 건설적으로 결혼의 대안을 찾자는 게 아니었다. 그냥 ‘네가 싫다. 너랑 같이 사는 게 고달프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 말에 당황했고, 발끈했다. 원룸을 따로 얻고 싶다는 내게 부루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 페미니즘 책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자, 이제 다시 한 번 이성을 부여잡고, 나의 황금 비율을 되찾기 위해 그와 또다시 길고 긴 대화를 이어가야 할까? 그리고 그 결심과 약속을 실천할 기회를 주어야 할까? 계속 노력, 노오력, 노오오력(실은 항상 내 쪽에서 먼저 요구, 요오구, 요오오구) 하다 보면 질적으로 다른 결혼생활을 하게 될까?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약간의 포기를 해야할까? 그럼 내가 계속해서 침범당하는 영역은? 내 존재에 생기는 생채기는? 그가 싫어지는 내 마음은 어떻게 하지? 


p41, 42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정현주, 민들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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