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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포포 Oct 24. 2021

순결을 잃는것보다 임신할까봐 더 두려웠던 우리들

성적자기결정권과 미레나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말은 ‘성’에 관한 사항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의 줄임말이다. 더 줄여서 ‘성적 자결권’이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의’의미가 무엇인가, ‘자기결정권’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


p16, 「성적 자기결정권」, 김유환, 북랩 2021


현재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성은 넘쳐나고 있다. 따라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를 논하는 데 대부분의 평균적인 남성들을 포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를 논하는 이유는 여성,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환전자) 등의 성적소수자를 포함한 ‘성적 약자’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p.79, 「성적 자기결정권」, 김유환, 북랩 2021




대학 2학년때 과 동아리 MT에서 피쳐 맥주병 몇개와 초록색의 소주병 몇병을 사이에 두고, 새우깡이며, 오징어땅콩같은 안주거리를 어설프게 펼쳐놓고 진실게임을 했다. (너무 유치한데 너무도 중요했던 그때) 초미의 관심사는 과 내의 유명한 CC였던 S와 재수생S의 연애사였다. 군대에 간 S의 연인이었던 S에게 우리는 짓궂지만 너무나 궁금한 그 질문을 조심스레 물었다. 둘이 잤어?


술기운이 오른 S는 첫 휴가 때 잤다는 말과 함께 현실적 문제를 소환했다. 관계 후 오빠가 너무 걱정을 해서 사후피임약도 먹고, 피임에 관해 초록창에 검색하느라 초조해하며 아침을 맞았노라고.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분명 콘돔을 사용한 관계를 했지만, 다음날 예정일에 생리가 없으면 불안에 시달렸다. 혹시? 99%예방율이지, 분명 100%는 아니지 않는가? 남자가 전희 단계에서 사정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까(절정에 오르기 직전에 급히 콘돔을 끼는 케이스도 부지기수다)하며 속옷에 빨간 그것이 묻어 나올날까지 걱정을 했다. 혹은 예정일이 조금 지나 빨간 피가 묻어 나오면, 이게 혹시 착상혈인가? 하는 과도한 고민에 까지 당도하곤 했다. 그 시절 우리는 남자 친구와는 오래도록 있고 싶어했으면서도,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선 너무도 두려워했다.


임신테스트기를 사러가는 건 또 어찌나 민망하고 부끄러운지 마치 갓 20대가 된 내가 나, 하고 다니는 여자에요.라고 선언하는 듯한 남모를 부끄러움. 자의식의 과잉. 지금 생각해보면 약국의 약사 입장에서는 그 많은 손님들이 타이레놀을 사가든지, 대일밴드를 사가든지, 피로회복제를 사가든지, 임테기도 그 중 하나인 약국에서 파는 비의료기기일뿐인데, 그때는 정말 약국 앞에서 얼마나 발걸음이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샀던 임테기는 몇 개 였을까.


성관계에서 을이 되는 기분은 이때 시작되었다. 남자야 사정하고 나면 잠들고, 옷을 입고 나서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에겐 그 이후의 가능성에 대한 걱정은 옵션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여성한테 국한된 문제였다. 나는 매번 남자친구와 혹은 어떤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서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담보로 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결혼을 하면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리란 생각을 했다. 엄마가 늘 낮은 목소리로 조리던, 여자는 몸 조심해야한다. 절대 남자랑 둘만 있을 기회를 주면 안되고, 삼촌도, 친척들도 마찬가지야. 라며 나에게 단단히 이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성적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환희에 젖은 날보다 엄마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침대 옆 낮은 협탁을 붙들고 우는 날들이 더 많았다.


육아의 지난함과 그 고단함을 몸소 경험하고 나니 덜컥 들어선 둘째에 나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를 낳고나면 바로 피임시술을 받기로. 그러나 남편과 시댁의 입장은 나와 같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생기면 낳고, 어떻게든 기르면 된다는 마인드였고(종교적으로도), 남편은 정관 수술같은건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내가 계속해 피임약을 먹는 것도 반대했다. 그래서 나는 산후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다니며 의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미레나 시술을 받고 싶다고.


둘째를 4kg의 난산으로 낳고 출산을 도와준 조산사 선생님은 <산모님, 둘째 낳으며 몸에 무리가 많이 갔어요. 당분간 피임 잘 하세요. 여자는 365일중 300일이 가임기나 다름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말은 내겐 사형선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두려웠다. 또 아이를 가질까봐. 나의 짧은 유희가 크나큰 책임감으로 다가올까봐 두려웠다. 나는 미레나를 삽입했다. 손톱만한 그것은 나의 자궁 속에 자리 잡고 자궁에만 국소적으로 프로게스테론을 제공한다. 우리가 높은 가임률에 노출되어 있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레나, 임플라논, 루프 등의 피임법이 있지만 기혼여성이 아니고서야 선택하기 쉽지 않은 방법이다. 나 역시도 첫 성경험 후 성적자기결정권 측면에서 여성 자발적인 피임법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다가올 날의 임신가능성을 아예 거세해버리는 듯한 두려움에 적극적인 피임법(몸에 삽입하는 형태)을 (미혼이었을때는)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반복해 파트너에게 콘돔 먼저. 라고 요청해야 할까. 그러다 나 몰래 빼버리기라도 한다면? 낮은 확률이지만 사용 중 콘돔이 찢어진다면?


나는 미레나를 선택했다. 아무리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라도, 그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이끌고 가고 싶었다. 남편과 시댁의견은 나와 같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알리지 않고 산부인과를 다녀오고, 검진때에도 <미레나 실이 안보이니 차후 산부인과 방문을 요함>과 같은 검의의 소견은 빼달라고 요청했다.


현행법을 살펴보자. 전혀 친여성적이지 않다. 심지어 임신중지가 합법인 프랑스에서, 콘돔을 사용했음에도  피임실패한 (0.6%확률) 오드 메리미오는 임신중지의 과정이 얼마나 여성을 고립시키고 우울감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경험했고, 8년이 지나서야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쓴 그래픽 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출간했다.


사랑과 박애, 평등이라는 기조로 세워진 프랑스에서조차 성적자기결정권은 합법적 임신중지 수술 외에는 발휘되기 어려워 보였다. 시몬 베유가 프랑스 보건 복지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5년, 임신중지가 합법화 되었음에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겪는극심한 고립과, 외로움, 죄책감, 고통은 별개의 문제로 존재했다.


현재 한국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2019년, 임신중단을 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과 임신중단 수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1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와함께 사법부는 국회에 관련 법 개정을 요청했지만, 그에 상응해 발의된 법은 현실인식이 거의 결여된 채 만들어져 더욱 여성의 선택권을 제한적이게 만들었다. 여성은 어떻게 성적자기결정권을 획득하고 발휘할 수 있을까.


2020년 제11회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이현석 작가님의 <다른 세계에서도>가 함께 오버랩된다. <다른 세계에서도>는 나머지 5편의 수상작과는 그 결이 다르게 다가왔다. 2019년을 논쟁이 뜨거웠던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그 법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 임신, 그리고 산부인과 전공의인 ‘나(화자)’의 이야기가 헌법불합치가 결정되던 2019 봄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너무나 격렬히 때로는 인류애와 이기심이 충돌하며 서사가 펼쳐지기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임신소식을 전했을 때, 기혼이라도 당혹감과 우울을 숨기지 못하는 산모들, 반대로 뜻밖의 유산에도 안도감이나 위안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오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자음과 모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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