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병상일지 25

by 박상진

1.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난 알고 보니 철없는 가장(家長)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스무여섯 살의 이른 나이로 교직에 몸을 담아서인지 사회생활이 남보다 빠른 편이었다. 평준화가 시작되기 전, 포항에서도 나름 명문(名門)인 사립 고등학교에서 특설반 담임으로 수많은 인재(人才)들을 길러냈다. 첫 졸업생들은 나와 나이차가 불과 열 살밖에 나진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사회상(社會相)에 힘입은 바,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지켜야 할 도리와 상대적 거리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특설반 학생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것을 잘 받아들였다. 지역 이름을 교명(校名)으로 하는 명문 공립 고등학교와 포스코 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 고등학교가 따로 있어 지역의 뛰어난 인재들을 대부분 선점(先占)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입시 결과는 이들 고등학교에 크게 뒤진 적이 없어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를 듬뿍 얻고 있었다. 결국, 학생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결과를 담보(擔保)해야만 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학교로 불려 오기 일쑤였고 평일에도 11시를 너머서까지 강제된 자율학습이 공공연히 강요되었다. 학생들이나 교사들 모두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사회적 기류(氣流) 역시 밖으로 드러난 결과 만을 중요시하여 교육을 편향적(偏向的)으로 내몰고만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런 경향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지역의 후발(後發) 사립 고등학교가 모기업(母企業)의 충분한 재원(財源)을 바탕으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지역 내 우수한 학생들을 장학생을 미끼로 싹쓸이해 가버리자, 치열해진 경쟁에서 그나마 살아남으려면 맨땅에 헤딩하듯 학교생활에 올인한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학생들의 희생양으로 삼아 이들을 더욱 강하게 조련(調鍊)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아이 둘을 가졌다. 육아(育兒)가 무엇인지, 가정의 존재 이유가 뭔지도 모를 만큼 늘 가정에 소홀했다. 아내는 집안 일로 항상 지쳐 보였지만, 몸이 체질적으로 약한 탓이려니 마음속으로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외식을 한 적은 있었어도 단 며칠간 시간을 따로 떼내어 가족여행이라도 떠난 적이 있었던가? 과거의 기억을 아무리 되살려보아도 좀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 더욱이, 가족사진? 변변찮은 것이라도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로는 아내를 포함해서 가족 모두의 살아가는 영역이 제각각 별개로 나눠져 버렸다. 말하자면, 한 집을 매개(媒介)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동거인(同居人)이나 다를 바 없었는데, 여느 가족이나 살아가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젖어있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불시에 덮친 폐렴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아내를 우선으로,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니,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회한(悔恨)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나란 존재가 이들의 머릿속에서 온전히 지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너무 서글펐다. 당혹스러운 마음에서 앞뒤 가리지 못하고 떠올린 생각인데,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다. 평온하던 삶에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치자 가족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머릿속을 순간적으로 장악(掌握)한 탓이다.


돌이켜 보면, 아내의 헌신적(獻身的)인 뒷바라지가 너무나 고맙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무척 놀란 듯했다. 하지만, 내가 입원한 이후로 모든 뒤처리에 소홀함이 없는 큰 아이는 여전히 듬직했고, 잔 정이 많은 막내는 이전보다 더욱 사랑스럽다. 비로소,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가족사진 속 우리들 표정 하나하나가 조각난 퍼즐을 맞춘 듯 하나의 가족사진으로 제대로 꿰어졌다.


2. 나의 어머니, 나의 동생들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험한 일을 당한 걸 모르고 계신다. 아버지 기일(忌日)에도 참석치 못한 이유로 둘러댄 것이 코로나 발병(發病)이었으니, 자가 격리 후로도 나와 아내가 여전히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줄만 알고 계신다. 가끔씩 어머니의 촉(觸)이 발동(發動)해서, 나의 안위(安危)를 요모조모 물어보고는 달리 걱정을 하시는 듯도 하지만 난 그래도 아무 일 없는 듯 여전히 시치미를 뗀다. 노인의 자식 사랑은 아직도 변함이 없지만, 이를 온전히 되갚기에는 늘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나이가 들면서 새삼 생각이 깊어진 것이 동생들과의 관계에 관해서이다. 사실, 나와는 일곱 살과 열 살 아래로 나이 차이가 적지 않은 동생들이어서, 평소에는 늘 어리다고만 생각하던 동생들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오히려 나보다 더 어른스러울 때가 많아진 것이다. 특히, 이런저런 행사에서 오빠를 배려(配慮)하는 마음이 속속들이 드러날 땐 고맙다는 인사말이라도 앞세워야 했지만 그냥 마음속으로만 삭일 때가 많았다.


동생들과 의논 끝에, 아버지 기일에 참석 못한 이유로 생각해 낸 것이 코로나 발병이었지만, 내가 폐렴으로 영남대학교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안부(安否)를 물어왔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막내 동생에게 필요한 물품을 요청을 하자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내용물이 반입(搬入)되었다. 어려움을 당하고 보니, 평소 일지 못했던 동생들의 우애(友愛)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부족함이 많은 오빠이지만, 앞으로 살아가며 두고두고 갚아나가야 할 고마운 일이다.


3. Epilogue

세상에는 어떤 일을 당하든, 이를 통해 배우지 못할 일은 없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횡액(橫厄)을 경험하고, 갖은 어려움 끝에 이전의 자리로 돌아오니 생각이 깊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나를 되돌아보며 하루가 멀다 하고 병상일지를 썼다. 병상일지 속, 담담하게 혹은 봇물처럼 쏟아지는 온갖 감정에 휩싸여 여러 가지 일들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 되돌아보니, 병상일지는 하나같이 사람들이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궤적(軌跡)을 추적한 것이고, 이를 통해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切感)하게 되었다.


모든 일은 끝이나도 끝난 게 아니다. 야구(野球)에서 속설(俗說)로 전해지는 명언이다. 이제 맺음말로 병상일지의 끝을 알리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이라고 본다. 이름을 달리 할 일지 속에는 앞으로 살아가며 경험하게 될 이야기로 내용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하나의 주제 아래, 여러 갈래의 내용을 묶어서 쓰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물론, 병원생활이라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건져 올린 이야기이지만, 글의 내용이 너무 암울(暗鬱)한 쪽으로 치우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거의 모든 글마다 맺음말로 희망을 담은 글 내용을 사족(蛇足)으로 붙여두었다.


모든 글을 끝까지 관심 있게 읽어 주신 분들과 입원 중에 늦게 소식을 듣고 안부를 물어온 모든 지인(知人)들에게 감사드리며, 특히 건강을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성원을 아끼지 않은 여러 브런치 작가님들에게도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