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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곤륜산

by 박상진 Feb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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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하루는 동네 커피숍에서 두 잔의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오는 일로 시작이 된다. 당장 분리수거를 해야 하거나 음식물 쓰레기가 있을 때는 둘을 별도의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아 집 밖을 나선다. 14층을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는 일이 무척 성가시기는 하지만, 새해 들어 부쩍 불어난 배둘레를 생각하 순순히 고생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8시가 되면 커피숍이 오픈하기 때문에 30분 일찍 집을 나섰다. 잠시이긴 하지만 아침산책을 미리 해두고 싶어서였다. 아파트 둘레길을 택해 동(洞)과 동(洞) 사이의 틈새길로 돌아 나오니 커피숍이 있는 상가까지 이르는데 대충 30분이 걸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들어선 커피숍 매장 안에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문해 놓은 커피를 텀블러에 들고 가면서도 몹시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출근길의 직장인일 게 틀림없어 보였다. 


사실, 뜨아와 아아가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이르는 말임을 알게 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은 입에 익숙하지가 않다. 하지만, "오늘도, 뜨아와 아아로 주시돼 아아는 얼음 많이, 물 적게요!"라고 달리 주문을 넣으니, 알바 아줌마가 커피를 내리는 내내 입을 가리고는 곱게 눈웃음을 지었다. 캐리어에 담은 커피를 받아 들고 매장밖을 나설 때는 객쩍은 마음에서 살짝 뒷목이 땅겼다.


샤워를 마치고 바디로션을 바르다 거울에 비친 귀밑머리를 보고 있는데 눈에 몹시 거슬렸다. 성에 차진 않지만 아침산책마저 어영부영 마쳤으니, 이발이나 하러 갈까 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거기, 단골미용실 가까이에는 점심까지 해결해 줄 오천 원짜리 칼국수집도 있지 않은가.


미용실로 가는 길에는 오랜만에 아들의 SUV를 이용하기로 했다. 좀처럼 차 쓸 일이 없다고 해서, 직장이 있는 구미로부터 되가져 온 것이 벌써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어쩌다가  번씩 SUV를 몰아서인지, 승용차를 운전할 때와는 색다른 맛이 났다. 미용실은 마침 한가했다. 막 이발을 마친 손님이 머리를 감으러 자리를 비키면서 바로 순서가 돌아왔다. 손이 재바른 미용사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두리뭉실 머리손질을 끝내주었. 하기야, 정수리가 듬성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솜씨 있게 매만져야 할 머리숱마저 별로이니 더 이상 시간 들일 건더기조차 남아있질 않았.


법원시장 안, '친정집 칼국수'는 점심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마침, 커플들 사이로 자리가  중간에 끼어 앉으니, "오랜만에 오셨네요."라며 등 굽은 주인 할매가 아는 척을 한다. 평상시처럼 칼국수와 수제비 반반의 칼제비를 주문하고는, 목을 길게 빼 들고 건너편 김밥집과 이웃한 어묵가게로 배달된 칼국수 김밥과 어묵과 함께 맛있게 먹는 모습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런 촌동네 칼국수집이, 이웃한 김밥집과 어묵가게와 공생(共生)하고 있 장면은 여타 재래시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1월 초순을 넘어가면서부터 모든 메뉴가 천 원씩 올라 칼제비의 가격은 육천 원이었다. 미용실도 이 동네로 이전하면서 이발비를 천 원 올려 육천 원을 받고 있으니, 여전히 둘 다 저렴하기는 해도 하루가 르게 올라가고 있는 물가가 실감이 났다. 국물마저 말끔히 비우고는 어묵가게로 자리를 옮겨 3개에 이천 원 하는 어묵까지 먹고 나니, 아침산책 길에 못다 채운 운동욕심이 되살아났다. 차에 올라 서둘러 시동을 거는데, 뜬금없이 칠포리에 있는 곤륜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칠포리 곤륜산은 한자로는 어떻게 표기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중국의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곤륜산(崑輪山)과 지명(地名)이 같다. 곤륜산은 중원(中原)에서도 멀리 떨어진 험악한 고원지대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 중국 신화 속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곤륜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칠포리 곤륜산도 포항 토박이들조차 낯설어하는 곳이지만,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곳이다.  해발 176m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활공장(滑空場)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검푸른 영일만과 포항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 볼 수 있다.


20 여분 걸어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쉬어가는데, 야트막한 소나무 수풀 사이로 앞서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활공장의 인조잔디 위로 막 올라서니 여자 사람 둘이 짐가방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신박해 보였다. 미리 양해(諒解)를 구하고 산 아래 멀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바닷가를 이들의 뒷모습과 함께 찍으려는데, 슬그머니 옆으로 손을 내밀어 검지와 중지로 V자까지 만들어 준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네니, 넙죽넙죽 잘도 받아 주었다.


대구에서 왔다고 하기에 바로 호구(戶口)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가까이 서 본 이들의 얼굴이 둘 다 예쁘긴 하지만 이국적(異國的)이었다. 그제야 두 사람이 나누던 말이 가까이서 들렸어도 알아듣지 못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한 명은 베트남 혼혈이고 다른 한 명은 순혈(純血)로서 서로 친구사이인데,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로 이야기를 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바다 위로는, 조금 전 활강(滑降)했던 주황색 패러그라이더가 먼바다를 배경으로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곤륜산 주차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기슭에는 우리나라 최대 암각화(巖刻畵) 중의 하나인  칠포리 암각화군이 분포되어 있다. 내친김에 이정표(里程標)를 보고 오솔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니, 산기슭의 개울을 끼고 돌출(突出)한 길이 3m, 높이 2m의 적황색 바위가 보였다. 칠포리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의 표면에 숭배(崇拜)하는 물건이나 사냥 대상인 사슴이나 말, 고래와 같은 동물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기호화하여 새겨놓은 것으로, 풍요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주술(呪術) 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 장구 모양의 도형 두 개가 아래쪽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그 옆이나 아래로도 여러 개의 희미한 흔적이 점과 선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었는데 오랜 풍파(風波)를 겪고서도 외형이 그런대로 잘 보존이 되어 있었다.


계곡 사이를 건너뛰어 암각화 가까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곤륜산을 등지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 위에서 볼 때는 감춰져 있지만, 물이끼가 살짝 끼어 있어 아래쪽으로 갈수록 장구 모양의 점과 선선명해 보이는 이 바위는 전체적인 색깔이 밝은 회색에 가까웠다. 이처럼, 곤륜산 기슭의 계곡 거의 방치(放置)되어 있다시피 외면을 받고 있기는 해도, 칠포리 암각화군은 단순한 선사시대 유물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료적(史料的) 의미는 차치(且置)하고서라도 선사시대 사람들이 암각화를 통해 남긴 미적인 감각은 예술적 판단 너머까지 그 존재 가치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칠포리 암각화군에서 고개 하나를 넘고 바닷가를 달리다 보면 오도리 언덕 중턱에 들어서 있는 사방공원(砂防公園) 기념관이 보인다. 오랜만의 바닷길 나들이어서, 돌아가 길은 월포해수욕장을 반환점으로 해서 사방기념공원까지 둘러보기로 처음부터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월포해수욕장과 가까운 이가리  전망대를 잠시 둘러보고는 바쁘게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렸다.


사방기념공원은 지난날 사방사업의 성과와 의미를 기리면서 숲 가꾸기와 산지 보존 등 사방사업과 관련된 자료와 장비를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치산치수(治山治水)하였으나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자자손손(子子孫孫) 가난을 속절없이 대물림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과 가까운 산야(山野) 대부분이 민둥산으로 피폐(疲弊)다. 황폐해진 산림을 되살리면서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를  미연(未然)에 방지할 목적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펼쳐진 산림녹화(山林綠化事業) 사업 덕분에 우리나라는 사시사철 녹음(綠陰)이 우거진 나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당시 산림녹화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열악(劣惡)지원에도 아랑곳없이 조림(造林)에 애쓰고 있는 모습을 실사화(實寫化)현장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


이 공원은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촬영지로도 오래전부터 입소문이 나서인지 평일인데도 기념관 앞 주차장에는 미리 온 차들이 만만찮았다. 곤륜산 못지않게 오션뷰로 이름 높곳이어서 공원 곳곳의 포토존마다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며 인생샷을 건지느라 분주했다.


마음먹고 길을 나서기가 성가셔서 그렇지 일단 집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오늘이 딱 그랬다. 곤륜산 초입(初入)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릴 때 마주쳤던 젊은 아빠가 문득 생각이 난다. 네댓 살 남짓한 딸아이를 앞세운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아이의 발개진 뺨은 온통 눈물콧물 투성이었다. 나무라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표정을 진작부터 읽고 있었던지, 바로 눈앞에서 아이를 무등 태우고는 쑥쑥 언덕길을 힘들이질 않고 잘만 올라갔다. 아마, 곤륜산으로 올라가는 이 친구 마음도 방금 전의 나 만큼 가벼웠을 게 틀림없었다.


중국의 설화(說話)도화(桃花)가 만발하는 이상향(理想鄕)의 땅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하고, 구체적인 지명으로 언급되고 있는 곳이 바로 곤륜산이라고 한다. 오늘, 홀로 오른 칠포리 곤륜산도 오늘만큼은 내게 있어선 무릉도원에 다를 바 없었다. 잠시간이라도 세상만사(世上萬事) 온갖 시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펼쳐 보이는 눈앞 광경은 낙원처럼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더욱이,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 땅에 유산으로 남겨둔 삶의 흔적마저 답습(踏襲)해 보지 않았던가.


햇살이 한차례 훑고 지나간 먼바다 위로, 홀로 된 갈매기 한 마리가 정처 없이 유랑길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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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 정상의 두 여인
베트남어로 정담을 나누고 있는 두 여인베트남어로 정담을 나누고 있는 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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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강 중인 패러그라이더와 산 아래 칠포리 풍경
장구 문양이 선명한 칠포리 암각화장구 문양이 선명한 칠포리 암각화
계곡 아래로 굴러 내려간 바위의 암각화계곡 아래로 굴러 내려간 바위의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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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리 닻 전망대와 닻 조형물
사방기녕공원 입간판사방기녕공원 입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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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공원 기념관과 포토존, 회의를 주재 중인 박대통령
사방사업 현장을 부조(浮彫)한 벽화사방사업 현장을 부조(浮彫)한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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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 차차차' 촬영장 안내판과 돌탑

영일만 친구 by 최백호

https://youtu.be/HFXoU3DHzwI?si=njA-mxnTsxcDZ4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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