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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취한고양이 Oct 30. 2024

십분 끄적-04. 사계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제주의 봄은 유채꽃에서 시작되어 벚꽃으로 절정을 이르렀다 메밀꽃으로 마무리한다. 여름이야 푸르른 바다와 더불어 숨 막히는 습도를 자랑(?)하고 가을은 오름 가득 피어있는 황금빛 억새가 절경이다. 겨울이 되면 주황빛 귤들이 온 동네에 지천이고 다설지답게 새하얀 눈이 한가득 내려 온 세상을 뒤덮기도 한다. 제주의 사계이다.


 그런데 사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8년간 살면서 일하는 곳은 거의 똑같고 꽃이나 억새 군락지라던가 바닷가라던가를 찾아가야 알 수 있는 흐름이고 내가 일하는 동선은 항상 녹색이 가득하니 시간이 지나감솔직히 잘은 느끼지 못한다. 짧은 옷을 5월부터 10월까지 입고 나머지는 긴 옷을 입으니 그냥 날씨가 덥다 춥다 정도이지 그냥 그려려니 하면서 8년을 살았다.

 어느 순간 시간이 이렇게 흘렀음을 느끼는 것은 호은을 보거나 직장동료의 조카들을 보았을 때 밖에 없는 듯하다. 어린이집에 들어가 재롱을 부리던 아이가 곧 중학생이 될 예정이고 분명 초등학생이었던 조카가 언제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더니 갑자기 성인이 되어 걸걸한 목소리로 '삼춘 안녕하세요? 저 취직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한다. 정말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나도 늙어갔을 텐데 나는 아직 그대로라고 믿고 싶다. 매주 깎는 수염에 흰 수염이 하나둘씩 생기는 것도 애써 외면하고 여기저기 몸이 쑤시기 시작하지만 30대 때와 다름없이 운동도 안 하고 있다. 내 나이 듦에 대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아직 40대 중반까지는 안 갔으니 괜찮다고 자위하며 애써 외면한다. 몸이 아프거나 하면 우스개 소리로 '아들 장가가는 건 봐야지'라고 하는데 이제 농담이 아닌 듯해서 마음과 몸을 세월에 맞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도 아직은 괜찮으니까 내년 1월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참으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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