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소음에서 벗어나기
뭔가를 항상 듣고 있다.
청소년 때부터 뭔가를 항상 듣고 있었다. 학생 때는 영어를 늘려보겠다고 '뮬란' 녹음본을 워크맨으로 하루종일 반복해서 듣고 있었고 지하철로 서른 다섯 정거장을 타야 했던 대학교 통학길에서는 막 출시됐던 16MB짜리 MP3 플레이어에 노래 5-6개를 넣고 계속 반복해서 듣곤 했다. 스마트 폰이 나온 이후 음악은 물론이고 팟캐스트를 통한 토크 프로그램도 내 귀를 떠나지 않았다. 소설책이 주이긴 하지만 음악을 들어도 항상 책을 읽던 내가 스마트폰이 나오고 온갖 콘텐츠를 내 손 안에서 볼 수 있게 되자 점점 책을 놓게 되었다.
일을 하는 것도 혼자서 운전을 하며 다니다 보니 트럭에 하루종일 라디오를 틀거나 어떤 날은 블루투스 연결을 해서 음악을 틀어놓고 다니며 배송을 한다. 서귀포까지 장거리 운전을 하는 날이면 좋아하는 토크쇼를 다시 듣기로 틀어놓고 다니곤 한다. 반려견 은호를 산책시킬 때도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쓰고 나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온다. 봄, 여름과 가을에는 이어폰이 날이 추운 겨울에는 헤드폰이 항상 준비되어 내 귀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어느 순간은 내가 음악이나 콘텐츠를 듣고 있다는 것을 잊을 때도 있지만 귀에서 뭔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뭔가라도 틀어놔야 안심이 되곤 한다.
며칠 전 반려견 은호의 산책을 나가는데 아들 호은이 자기도 같이 나가겠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랑 가는데 헤드폰을 쓰고 나가기는 좀 그래서 맨 몸으로 나갔다. 빌라 단지 입구로 나가는 길 내내 옆에서 조잘대는 아들 말을 들으며 함께 걷는 중에 갑자기 단지 놀이터에서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아이들이 아들과 함께 놀겠다고 하는데 안된다고 할 수는 없기에 산책하는 동안 놀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졸지에 다시 혼자가 된 나는 귀에 아무것도 없이 산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단지를 벗어나 산책 코스인 귤밭길 초입에 가기까지 다시 집에 가서 헤드폰을 가져와야 하나 라는 고민을 했지만 이왕 나온 거 그냥 가자 하면서 걸었다.
귤밭들 사이 돌담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좋은 날씨를 느꼈다. 입춘이 지나고도 일주일을 내리 눈이 내리고 추웠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푸른 하늘과 햇살이 내가 걷는 산책길에 쏟아졌다. 바람도 살살 불면서 돌담길 옆 동백나무들을 훑어 주면 샤라라락 하며 잎사귀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헤드폰을 쓰고 패딩 후드를 눌러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며 산책 할 때에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느껴졌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산책로를 1년을 넘게 다녔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참 나 스스로가 바보같이 여겨졌다. 귀찮음을 등에 업고 그저 의무감으로 다니던 길에서 헤드폰 하나 안 챙겼을 뿐인데 자연의 풍광에 감동하고 귤나무들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에 축복받은 길로 바뀌어 버렸다.
단지 귀를 열어놨을 뿐이었다.
온갖 재미있고 신나는 콘텐츠들도 좋지만 결국 나를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런 소음에서 벗어난 자연 속 고요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서울도 아니고 제주에 살고 있으면서 자연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참 잘못된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산책이었다. 내가 불안하지 않으려 선택했던 소음에서 벗어나 진짜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