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대숲 늘 푸른 죽변

27코스 : 죽변항입구 - 부구삼거리. 11.4km

by 물냉이

해파랑길 27코스는 죽변항입구에서 출발해 부구삼거리까지 가는 울진에서 가장 짧은 구간이다. 죽변항의 죽변등대,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촬영장인 어부의 집, 하트 해안 등을 본 후에는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길을 따라간다. 죽변항의 동쪽 해변(죽변 중앙로 235-8)에서 후정해수욕장까지 4.8km의 죽변해안스카이레일이 설치되어 민간에 위탁 운영되고 있다. 한울원전이 있는 구간은 후정리와 고목리의 농경지가 펼쳐진 길을 따라 걸어가고, 신화리에서 부구리까지 가는 길은 도로를 따라 언덕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진다.

하트해안과 대나무숲의 과거사진. 대나무숲 오솔길은 용의 꿈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는 리모델링해서 붉은빛의 새로운 모습을 하고 '어부의 집'으로 불리고 있는 수리 이전의 세트장과 교회. 교회건물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향나무가 지키고 대나무가 막아주는(죽변항입구 - 죽변등대)

죽변항 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잠깐 마주친 해파랑길지기와 헤어져 죽변항 쪽으로 걸어간다. '해파랑길지기'는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은 어디서 만나든지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오랜 친구인 '지기'와도 같다는 생각에 내가 붙여본 이름이다. 같은 목적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고, 걷기가 힘들어질 때 만나면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후정리의 길가에 서낭사라고 쓰여 있는 서낭당과 어우러져 서있는 향나무가 있다. 후정리향나무로 알려진 이 나무는 수령이 500년으로 1964년에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후정리향나무는 원래 울릉도에서 자라던 것인데 육지로 가고 싶어서 용왕에게 애원해 파도를 타고 육지로 오게 되었는데 그때 도착한 곳이 울진의 후정리였다고 한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이 나무는 육지로 와서 성공한 것이다. 처음 자신을 반겨주고 관리해주었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울릉도의 도동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어 향나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가만히 이야기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이 육지를 동경했다는 이야기지만, 나는 울릉도의 향나무 집안이 얼마나 훌륭하면 이렇게 타지까지 와서 잘 자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굳이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바다 건너 찾아온 사람들을 잘 대접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간 이 지역 사람들의 품성도 여간 훌륭한 게 아니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땅도 좋고, 나무도 좋아야 한다. 천연기념물 향나무 옆에는 줄기가 누운 향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향나무에서 나온 씨앗이 자란 것으로 보이는 이 나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 끈질긴 향나무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서낭당 앞에는 황토를 뿌려 주변을 정화한 흔적이 남아 있고, 보호 철책 바깥쪽에 향과 종이를 태운 흔적이 있다. 다른 지역은 '부정풀이'로 짚을 태우는데 이곳은 향을 태운다. 동제도 죽변리와 후정리 주민들 뿐만 아니라 인근 여러 지역에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이 곳은 이제 죽변면을 대표하는 서낭당이 되었다.

죽변항과 죽변등대가 있는 죽변리는 대나무가 많은 해안가라는 뜻의 죽빈(竹滨)으로 불리다 이것이 죽변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폭풍 속으로 세트장 주변의 죽변해안에는 이대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폭풍 속으로는 김석훈, 송윤아 등이 출연한 드라마인데 드라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촬영장은 아직도 이 곳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곳은 젊은 연인들에게 하트해안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해안스카이레일이 설치된 후의 경관은, 예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사라진 듯하여 섭섭한 곳이다.

죽변면의 서낭당과 서낭목이기도 한 천연기념물 158호 향나무. 서낭당 앞에 부정을 타지 않게 하기 위해 뿌린 황토와 향을 피운 모습
천연기념물 향나무와 옆으로 줄기가 누워서도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는 향나무
죽변항의 대게 상가와 항에서 말리고 있는 가자미



보리밭을 따라 걸으며(죽변등대-후정2리 마을회관-신화1리-부구삼거리)

죽변등대를 지나면서 해파랑길은 바다를 따라가지 못하고 다시 내륙으로 들어간다. 27코스의 바닷길은 반 정도는 해안스카이레일이고 나머지 반은 한울원전이 있어 내륙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죽변의 거리를 지나면 한적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주변으로 경작지가 펼쳐진다. 이 밭은 계절에 따라 작물들이 변하기 때문에 작물들이 만들어 주는 경관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도 그리 나쁘지 않다. 겨울에는 보리싹이 잔디처럼 깔린 모습을 보며 초원을 떠올리거나, 뿌려 놓은 퇴비를 보며 부지런한 농부를 떠올리기도 한다. 죽변 비상활주로는 들길이 끝남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분명히 이 곳에 비상활주로가 있는 이유가 있을 텐데 설명문 하나 세워 놓으면 어떨까. 후정 2리를 향해 걷는 길에 꽃봉오리를 맺은 매화를 만났다. 피지 않은 꽃에 아름답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꽃봉오리를 볼 땐 미래가 떠오른다. 누가 나에게 활짝 핀 사람과 활짝 필 사람 중 누구를 만날 거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후정 2리의 마을회관 옆 정자에는 200년이 넘은 팽나무가 서있다. 보호수인 이 나무의 모습이 마치 정자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려 서있는 순록의 모습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어캣 같기도 하다. 나무에서 동물을 상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걷다 보니 별생각을 다하게 된다.

원자력발전소의 송전탑을 바라보며 고목리의 길을 걸어 신화리의 고갯길을 넘는다. 부구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 언덕길을 전속력을 다해 뛰어가던 때가 있었다. 머리는 돌고, 가슴은 터질 것 같은데 거리는 왜 그렇게 좁혀지지 않는지. 옥계서원 유허비각 앞에서 잠시 천천히 걸으며 '여기서 차를 놓치면 내일 일정이 모두 엉망이 될 텐데 어떡하지' 고민하다가도 두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를 서낭목으로 하는 신화리의 서낭당에선 '그래 오늘 버스를 탈 수 있을 거고, 내일은 일을 잘 마칠 수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곤 다시 죽어라고 뛰었다. 부구리의 아파트들이 저 멀리 보이는 한울원전 옆의 내리막 길을 뛰어갈 때, 지나치는 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라도 가관이었을것 같다.

한울원전 입구를 지나 부구교를 건너면 대가돌솥밥집이 있는 건물의 뒤편에 안내판과 스탬프함이 있다. 듬성듬성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해파랑길 27코스의 끝까지 와버렸다.

푸른 초원을 만들어 주는 보리밭을 따라 걷거나 비료를 미리 준비하는 밭가를 걷다보면 어디선가 "보리밭 사잇길로~" 하는 노래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 무덤의 주인은 자신이 평생을 농사 지었을 땅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며 별생각을 다 한다.
5월이면 이곳에도 노란 보리밭이 펼쳐지겠지.
죽변비상활주로에 누군가 작은 그물을 말린다. 후정 2리의 팽나무는 우산을 든 순록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미어캣같기도 하다.
옥계서원 유허비가 있는 비각과 신화리의 서낭당 앞을 지난다.
한울원전 정문엔 임금투쟁과 정규직 전환 투쟁을 이기자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27코스 종착점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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