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28코스는 부곡과 나곡의 짧은 해안을 따라 걷다 내륙의 산길을 걸어 원덕읍에 이르는 구간이다. 바다의 절경과 산길의 호젓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강원도 삼척시로 넘어가는 경계가 있는 구간이다.
부구천하구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하구의 넓은 사구는 성토되어 토지가 되고, 콘크리트 옹벽이 해안을 대신한다.
상처가 깊어가는 해안(부구 삼거리-나곡 1리)
부구삼거리에 도착한 시간이 다섯 시, 계속 걸을 것인지 오늘 일정을 마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지금 걸으면 밤길을 가야 하는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가기로 했다. 과욕을 부린 거다. 부구천하구는 사구가 넓게 발달한 곳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버려진 바다 같지만 이곳은 통보리사초, 좀보리사초, 갯메꽃, 갯그령 등 다양한 사구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하구의 식생이 발달한 얼마 되지 않는 하구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하구의 사구가 있던 자리를 성토하고 가장자리에는 제방을 쌓았다. 마치 서해에서 갯벌을 매립하듯이 사구를 매립한 것이다. 공유지를 매립해 토지를 얻어 좋은 쪽도 있겠지만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부구천 하구는 울진남대천과 왕숙천과 함께 규모가 큰 자연하구인데 이곳이 사라지면 사구에서 자라는 사구식생과 식생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지를 잃게 된다. 그리고 부구천은 모래가 많은 하천이다. 하구에 퇴적되던 모래는 다 어디로 갈까. 제방은 사구가 가지고 있는 완충능력을 대신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의 어디선가 발생할 환경영향은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돈을 적게 투입해 개발하는 장점만 생각하고 그로 인해 사라지는 사구의 가치와, 새롭게 발생하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투자되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부구터미널은 손으로 버스 시간표를 적어 알리던 곳이어서 정감이 드는 자그마한 정류장이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려보았는데 이제는 인쇄한 시간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인쇄가 깔끔하게 보이고 일손도 덜 들겠지만, 그동안 느껴오던 관리자의 손맛은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가끔은 비용을 지원해서라도 유지하고 싶은 사소한 것들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사라질 때, 가슴 한쪽으로 밀려오는 허전함을 어쩔 수 없다.
부구터미널의 모습과 터미널 안에서 손으로 적어 관리하던 시간표와 새로운 인쇄물 시간표
부구리에서 석호방파제가 있는 나곡 1리까지는 작은 해변에 모래사장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탐방로 주변의 경관은 바위들과 어우러져 아름답지만 개발로 인해 해안가의 사면이 붕괴된 곳들도 있다. "여기도 개발의 그늘은 피해 가지 못하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을 주장하고 개발하는 것을 어찌 막을까. 하지만 공유지로 되어 있어야 할 곳이 사유지로 변하거나 개발되는 게 현실이다. 해파랑길에서 일어나는 유난히 많은 개발행위들을 보면 앞으로 이 길에서 무얼 볼 수 있을까 싶어 진다. 부구리의 작은 해변에서 바위 옆으로 난 데크 탐방로를 걸어 파도소리가 커지는 나곡 1리의 해변으로 나아간다. 어둑어둑 해지는 마을길을 걷는데 서낭당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가 날 저물기 전에 어서 가라며 가지를 흔들어 준다.
아름다운 바다경관과 해안가의 바위 옆을 지나는 탐방로
개발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낯선 경관을 연출해 낸다. 저런 곳이 사유지란 건가? 개발이 가능하다는 건가?
해가 지는 시간 나곡 1리의 바닷가를 바라보며 걷는다. 나곡리의 서낭당에는 부호황당(否湖隍堂) 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으며, 느티나무 서낭목이 넓은 수관을 자랑한다.
불빛을 따라가며(나곡 1리- 도화공원)
나곡 바다낚시공원으로 가는 입구에 모텔의 네온사인이 어서 오라 유혹한다. "미안, 아직 갈 길이 좀 더 남았다." 가스저장소 앞에 있는 곡리버스정류장에 앉아 부구터미널 옆 분식집에서 산 김밥을 까먹었다."힘을 내자." 망자산을 지날 무렵 하늘엔 달이 떠올랐다.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어둠은 길 주변의 모습을 가려 대부분의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게 하지만, 저렇게 좋은 풍경은 걷는 다리에 힘이 나게 해 준다. 나곡해수욕장 입구면 전 구간의 삼분의 일 정도 온 것인데 너무 늦을 것 같아 걱정이 된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해지려 어두워져 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나곡해수욕장은 규모가 작은 해수욕장이지만 모래사장이 좋고 조용해 이곳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광해군의 숙의 윤씨에게서 태어난 옹주의 태실 입구를 지날 때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28코스를 시작할 때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밤길을 걸을 것은 예상했지만 산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산길은 바닷가의 길과 다르다. 우선 산을 올라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 주인을 알 수 없는 소리가 이어진다. 끊임없이 파도소리가 함께 해주는 밤바다와는 전혀 달랐다. 가끔 멀리 개 짖는 소리도 들리는데 이 소리는 오히려 위안이 된다.
지도를 보고 고포 해안으로 내려가 바닷가를 걸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울진군의 쓰레기 매립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 매립장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외등만 켜져 있고 어둠 속에 멈추어서 있는 포클레인, 쓰레기 더미들은 음침했다. "가본 적 있는가? 없다면 권하지 않는다." 돌아 나와 고포로 내려가는 산길을 걷는데, 휴대폰 불빛 외에는 암흑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아주 작은 소리도 크게 들렸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저게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인지, 동물이 지나가는 소리인지, 아니면 등 뒤에 하얀 소복 입은 귀신이 서있는 건지.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잡생각이 떠올랐다. 소심한 나는 혼자 하는 밤 산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서우니까." 조금 내려가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다시 돌아 큰길로 갔다. 무섭기도 했고, 사고 확률이 높은 어두운 산길을 포기한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곡해수욕장 근처에서 먹구름 사이로 달이 떴다. 잠시 마음이 안정되어 산길을 따라 오른다.
잘못 들어간 폐기물 매립장은 혼자 걷는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산길은 좁은 산길보다는 나았지만 조금 걷자 갑자기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길은 보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추위와 두려움, 진눈깨비 쏟아지는 산길이라니.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큰 소리를 내도 소리는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진눈깨비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만이 귓가를 울린다. '그래도 얼마 만에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본 건가.' 등을 켜놓은 도화동산 앞을 지날즈음에 진눈깨비가 잦아들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었다." 2000년 4월에 발생한 동해안 산불이 울진까지 내려왔었다. 양양의 낙산사까지도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큰 산불이었기에 울진군에서도 많은 인력을 동원해 겨우 산불을 진화할 수 있었고 그날을 기념해 이곳에 배롱나무를 심어 도화동산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보면 멀리 바다경관까지 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냥 산속이다.
갑자기 쏟아진 진눈깨비는 밤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 날리는 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어둠속에 등을 켜놓은 도화동산과 비오는 낮에 찍은 도화공원과 배롱나무
바닷길이 있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울진군에서는 나곡해수욕장에서 고포해수욕장까지 탐방로를 개설하려고 했었는데 아직 개통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곳에는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을 때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육지로 침투한 곳이다.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한 사건이다. 지금은 군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는 이곳의 해안은 군인들이 이동하는 통로를 따라 바다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의 끝에 있는 고포마을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에 의해 마을이 반으로 갈라져 있는데 길의 남쪽은 울진군 북면 나곡리이고, 북쪽은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에 속한다. 한 마을에서 행정구역이 달라 마을 주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마을을 합칠 경우 도의 경계와 바다의 어장도 주인이 바뀌게 되므로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난 지점의 모습과 철책 안쪽의 모래사장과 해란초군락
고포앞 바다의 풍경과 고포마을에서 바라본 길 건너 삼척 월천리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도화동산-월천교-호산 버스터미널)
도화동산을 떠나 고갯길의 정상을 넘어 내려가니 어두운 레미콘 공장의 음영 너머로 호산리의 불빛이 보인다.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불빛도 크게 보인다. 이제부터는 강원도이다. 마음이 가라앉으니 검은 구름 속에서 잠깐 둥근달이 고개를 내민다. 레미콘 공장 아래쪽의 소로를 따라 걸으면 수로부인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산속에 돌을 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길에서의 무사를 빌었다는 '국시댕이'를 볼 수 있고, 낙엽 쌓인 산길을 걸어 월천 1리까지 내려갈 수 있다. 월천 1리에는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살을 부비며 서낭목으로 서있는 월천서낭당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밤에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어서 도로를 따라 월천리로 내려간다. 잠깐 고개를 내밀었던 둥근달은 그 뒤로도 한 번 더 얼굴을 보여주며 밤길을 함께 해주었다.
레미콘 공장 너머로 보이는 호산리의 불빛과 사방이 깜깜한 길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달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에서 가까운 자유수호의 탑과 수로부인길을 알려주는 안내판, 산의 오솔길에서 만나는 '국시댕이'
고천리로 내려오자 한국가스공사 천연가스 저장소의 밝은 불빛이 가곡천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준다. 가곡천의 하구에는 소나무가 멋들어진 경관을 이루는 하중도인 '속섬'이 있다. 영국인 사진가인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가 2007년 속섬의 물에 비친 소나무를 사진으로 찍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 뒤로 많은 사진 애호가에 의해 작품으로 속섬의 풍경은 재탄생되었다. 속섬은 가곡선의 하구를 살려 스스로를 지키기도 했다. 가스저장소를 지으며 하구의 폭이 축소되어 훼손될 우려가 있었는데 지역주민과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하구의 폭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립 훼손되는 부구천 하구와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밤에 빛나는 가곡천 하구 옆의 가스저장고와 가스저장고를 바라보고 있는 하구의 달뿌리풀
속섬은 살아 있는 가곡천하구를 유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갈이 퇴적된 사이로 바다로 물이 흘러가는 하구에서 누군가 투망을 하고 있다.
가곡천은 연어와 은어, 황어 같은 회유성 어류들이 찾아오는 하천이다. 현재 가곡천 하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캠핑을 할 수 있는 월천유원지가 새롭게 단장되어 캠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한산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개선되면 이 캠핑장은 전국적으로 사랑을 받을 만한 곳이다. 그런데 유원지의 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돌을 쌓아 수중보를 만들어 놓아 회유성 어종들의 이동경로 중 대부분이 막히게 되었다. 수중보의 북쪽에 약간의 물길을 조성해 놓아 물고기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지만 폭이 좁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물고기가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물고기들이 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물길을 확장해주고 수중보의 상류에 회유성 어류들의 산란장과 치어가 살 수 있는 서식지를 마련해 생태관광을 하면 어떨까? 이렇게 되면 캠핑 온 사람들이 단순한 물고기 낚시가 아닌 회유성 어류들을 포함한 다양한 물고기들이 물을 타고 오르거나, 알을 낳는 모습, 치어의 생장 모습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코로나 19 이후 관광의 형태도 대량관광보다는 소규모의 체험형 관광이 많아지고 있으니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것이다. 이런소규모의 생태관광이나 체험관광이 지역의 소득을 보장하고, 관광객은 안전을 느낄 수 있는 관광이다.산업시설이 급증하고 있는 삼척시에서도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친환경적이고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는 생태관광 상품을 더 많이 개발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불빛을 보면 안심하게 되나 보다. 어두운 거리를 걸어도 7번 국도의 가로등이 비치는 거리는 두려움이 거의 없다. 가늘게 비가 내리지만 수시로 빛깔을 바꾸는 호산교 앞에 도착하니 호산천 건너 가로등이 빛나는 마을이 반갑기만 하다. 하루 종일 많은 거리를 걸어 지친 상황인데 거리는 너무 조용했다. 겨우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